1.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연쇄 살인범을 쫓는 형사가 범인에게 다가갈수록 그곳에 자기 딸이, 그다음에는 아내가, 그리고 그 마지막 끝에 자기 자신이 서 있음을 발견한다. 안전하고 익숙한 것들의 배신,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이 기묘한 고리. 티머시 모턴은 이 낯설고 어두운 기묘함에 대한 알아차림이 자신의 생태론이라고 말한다. 검사가 범인이고, 국가를 지켜야 할 대통령이 내란의 수괴인 이 기이함. 이 멜랑콜리 누아르 재난 스릴러 같은 드러남은 양말을 뒤집듯 지구인의 배를 뚫고 나오는 에일리언과 같다. 이쪽에 인간, 사회, 지구인, 형사가 있고 저쪽에 비인간, 자연, 에일리언, 범인이 있지 않다. 후자는 전자가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위해 대상화 한 자기 그림자이다. 그림자의 현현에 놀라는 자기 동일성은 자기 배에서 튀어나온 이 낯선 에일리언 앞에 서있다. 인류는 지구온난화에 의한 ‘여섯 번째 대멸종’ 앞에 서있다.
![]() ▲ 티모시 모턴의 농업에 대한 재해석 『어두운 생태학』 © 갈무리출판사 |
배제를 통한 자기 동일성의 반듯하고 순결한 이분법적 인식이 지구온난화의 원인임을 티머시 모턴은 지적한다. 인간/비인간 이원론의 경계를 존재론적으로 해체해 온 사변적실재론 연구자인 티머시 모턴은 객체지향존재론에 입각한 자신의 생태론의 틀을 구성한다.
2. ‘유기농’이라는 강박증
생태적 알아차림을 티머시 모턴은 ‘농업로지스틱스’라고 부른다. 비옥한 초승달 문명 이래 땅을 갈고, 물길을 트고, 씨를 뿌리고, 피를 죽이고, 밀을 베고, 낱알을 터는 알고리듬은 토양, 물, 새와 벌레, 식물, 금속기술, 그리고 인간집단의 협업 농업기계들이었다. 그리고 이 농업기계는 병충해, 전염병, 사유재산, 상업, 노예, 가부장제, 전쟁으로 이어진다. 인간과 자연이 갈리고 문명과 야만이, 자본과 자원이 갈린다. 이분법적 알고리듬은 자연과 야만과 자원에 대한 인간과 문명과 자본의 기술적이고 계회적이며 논리적인 ‘로지스틱스’이다. 티머시 모턴은 현재의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산업화가 아닌 농업화라고 말한다. 농업은 이미 식민화된 객체 ‘자연’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순결하게 정화(purify 브뤼노 라투르)된 ‘인간’과 ‘자연’의 분리 강박증은 조화롭고 순환적인 ‘자연’에서 우유적인 것들을 히스테릭하게 추방하며 존재론적 두려움과 불안을 제거하려 한다. 초록색 천상의 먹이 ‘유기농’은 이 순결한 ‘자연’에 대한 강박적 신화이다.
23억 년 전부터 시작된 시아노박테리아의 배설물인 산소로 나는 숨 쉬며 ‘나’로 존재하고 있다. 내 대장 속에는 수백 종의 박테리아 테라리움인 마이크로바이옴이 있다. 박테리아들과 나는 비연속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나는 이 비연속적 존재자들과의 집단적(collective) 존재이다. ‘나’는 비연속적이다.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비인간들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각 독립된 존재자들이 공생하는 공동체(community)가 아닌 집합체(collective)이다. 나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의 합은 전체로서의 나보다 크다. 티머시 모턴은 브뤼노 라투르의 라임을 살려서 “우리는 결코 신석기인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3.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티머시 모턴의 생태적 상호의존성 이론은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의 방법으로 농업로지스틱스적 생명체에 대한 관념을 해체한다. 그의 상호의존성 공리는 첫째, 존재자 a는 a가 아닌, 비(非)a들로 구성된다. 둘째,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부터 유래한다. 그렇다면 한 존재자와 다른 존재자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존재자를 구별하면 한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에서 발생할 방법은 없다. 비버의 DNA는 비버의 수염 끝에서 멈추지 않고 비버의 댐 끝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비버는 비버이고 댐은 댐이다. 댐은 시멘트와 철근으로 만들어지지만 댐은 댐이고 시멘트는 시멘트고 철근은 철근이다. 부분으로 환원되지도 않지만 종(種)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이 길항에너지 자체가 집합체(collective)로서의 존재자이다. 농업로지스틱스적 시각에서는 모순인 이 상호의존성은 현존과 부재의 나타남과 물러섬의 차연에 의해 해체되는 ‘놀이’이다. ‘놀이’ 개념은 티머시 모턴의 책 『저주체』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전체는 자신의 부분의 합보다 작아서, 자신의 부분들에 의해 ‘저월(subscendence)’된다. 저월은 티머시 모턴의 용어로 ‘초월(transcendence)’을 전도한 것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 녹아내리는 빙하는 북극이 아니라 우리를 저월한다. 기묘한 나타남과 친밀한 배신으로 저월되는 놀이가 존재자임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지구온난화 시대 미래 공존의 논리라고 티머시 모턴은 말한다.
‘자연’이란 없다. ‘자연’은 저월되어야 한다.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는 ‘날씨’가 저쪽에 있고, 인간 사회의 역사적·정치적 ‘기후’가 이쪽에 있다. ‘날씨’와 ‘기후’의 정신분열증 앞에서 티머시 모턴의 생태적 알아차림은 우울하다. 인간이 지구의 지질학적 힘으로 저월되는 그의 생태학은 낯설고 기묘하다. 그리고 인류세의 멜랑콜리아를 스쾃(squat)하는 그의 생태학은 달콤하다.
* 글쓴이 이수영은 미술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