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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북한산 산행길의 추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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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관
기사입력 2025-02-02

▲ 북한산 산행길  © 대자보


겨울 산행길에서 눈 덮인 백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봤고, 길 지근거리에 있는 독립운동가의 묘를 보며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이 연상됐다.

 

눈을 밟으면 유서 깊은 사찰의 모습도 관찰했고 바위에 새긴 조선시대 표식과 깊은 산골짜기 바위를 뚫고 흐른 약수로  단숨에 목마름을 해결했다. 특히 산 중턱에 우뚝 서 있는 목 잘린 두 개의 망부석에, 돌멩이를 언저 얼굴을 대신한 모습을 보며 궁금증이 들었다.

함박눈이 내렸던 1월 31일에 이어 2월 1일도 산행을 했다. 31일은 홀로 눈을 맞으며 서울 강북구 수유동 백련사 길을 걸었다. 

 

1일 오후 2시 30분경 작가와 작가의 딸 아이(초등 1년)와 함께 서울강북구청소년수련원 주변에서 출발해, 독립운동가 강재 신숙 선생의 묘지를 지나 보광사 뒤쪽 산행 길(둘레길)을 따라 솔밭공원으로 향했다. 바로 전날 눈이 많이 온 탓인지 가파른 산 입구부터 미끄러운 눈밭 길을 걸어야 했다.

 

 산과 산길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양지 바른 곳은 약간 눈이 녹아 미끄러웠고, 음지의 꽁꽁 언 눈을 밟으니 미끄러지지 않고 제법 걸을 만했다. 산행을 하면서 첫 번째 접한 곳이 독립운동가 강재 신숙 선생의 묘였다. 

 

이곳 주변은 4.19민주묘지를 비롯해 독립운동가들의 묘가 유난히 많아 순례길이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신숙 선생은 경기도 가평 출신으로 1885년 12월 29일 출생해 1967년 11월 22일 영면한 애국지사이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교정 및 인쇄 배포했고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해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관여했다.

 

특히 1930년대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한국독립군 참모장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신숙 선생 묘 옆 비탈길을 따라 가면 나무 계단이 나오고 그곳을 오르면 대한조계종 사찰인 보광사가 나온다.

 

 이곳은 산행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지고 4.19 전망대를 거쳐 솔밭공원으로 가는 길과 보광사 뒤쪽으로 향해 솔밭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전자 보다 후자 코스가 좀 더 긴 산행 길이다. 함께 산행을 한 작가와 딸이 보광사 뒤쪽의 산행 길을 택했다. 

 

이곳 갈림길 바로 앞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은 바위가 줄지어 있는 유적이 하나 있다. 앞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자세히 살피면  한자로 宮禁場(궁금장)이라고 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사산금표(四山禁標)로서 소나무의 벌채와 묘를 쓰는 것을 금한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조선 후기 한성부 관할권인 도성 안과 성저 10리 이내 송림(松林)의 벌채를 금지하고 장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세워 놓은 표식인 셈이다.

 

 조선 후기 유적으로 도성 안의 인구가 팽창하면서 부근의 무분별한 벌채와 장지 확대가 증가하자, 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바위에 표식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이곳 유적을 지나 급경사 비탈길을 오르면 완만한 눈길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주변을 보면 사찰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보광사 겅내이다. 절 마당과 대웅전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이어진 눈길을 따라 걸으면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 반복되고, 조금 지나면 수질검사로 부적합 판정을 받아 폐쇄된 약수터가 나왔다. 이곳에서 좀더 발걸음을 재촉하면 가파른 능선이 나오고 능선에 오르자, 시내가 한눈에 들어 왔다. 일부 강북구와 도봉구 일대인 듯했다. 일행은 능선 바위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내리막 길은 너무 미끄러웠다. 아이는 연신 엉덩방아를 찧고도 마냥 즐거워 미소를 잊지 않았다. 작가와 아이가 내리막길을 향할 때는 썰매를 타듯 앉은 채로 미끄러졌다. 아이의 엉덩이를 받치는 바지 주변은 내리막길 눈에 미끄러져 흠뻑 젖었다. 그래도 아이는 동심에 젖어 신이 났다.

 

한참을 걸었을까. '세이천(洗耳川)'이란 약수터가 나왔다. 약수터는 1975년 단오에 발견돼 1977년 3월, 식수로 첫 이용됐다. 수질이 좋아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목을 추기는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세이천은 말 그대로 몹쓸 말과 못들을 말을 들었을 때, 귀를 닦아 새롭게 정진하자는 의미의 옹달샘인 셈이다. 이곳은 바위가 병풍 친 듯 둘러싸여 골도 깊고 숲도 우거져 인간에게 활기를 주고 있다. 바위 틈 깊은 곳에서 물이 흘러 맑고 깨끗해 식수로서 으뜸이라는 말도 구전되고 있다.

 

세이천을 지나자, 다시 눈에 덮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그동안 산길을 걸으며 엉덩방아를 많이 찧었던 작가와 아이는 내리막길이 나오면 아예 엉덩이를 눈길에 대고 썰매 타듯 내려온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특히 이곳 산 중턱에 세워진 목 잘린 두개의 망부석의 의미가 궁금했다. 묘도 없는 산 중턱에 거리를 두고 위 아래 서 있는 목 잘린 망부석에 돌멩이로 얼굴을 대신한 사연은 대체 뭐였을까.

 

산길은 온통 미끄러운 눈길이었다. 마침내 도선사와 솔밭공원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 종착지가 가까워졌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이곳 주변은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의 묘가 있고, 또한 6.25 전쟁 당시 최후까지 적에 함락된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해 남산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1949년 최초로 군 기병대대를 창설해 초기 기갑연대장을 역임했던 이용문 장군의  묘가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의 정치파동 당시 정권의 군 개입 명령을 반대하며,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날 고 이용문 장군 묘가 있는 길가에 한 아주머니가 반려견 세 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 그중 한 마리가 앞의 한 다리가 없는 장애견이었다. 잠시 세발 자전거가 연상됐다. 세 다리를 활용해 절둑거리며 간신히 걸었다. 과거 '토토'라는 반려견을 키운 경험이 있던 작가는 그를 발견하고 측은한 모습으로 지켜봤다.

 

그 모습을 본 아이는 강아지 곁으로 가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줬다. 고 이용문 장군 묘를 잇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박을복자수박물관'이 나왔다. 잠시 온 김에 작품을 관람하려고 했던 박물관 정문 출입구는 꽁꽁 잠겨 있었다. 정확히 서울 강북구 삼양로 149번지 길에 위치했다.

 

 이곳은 서울 강북구가 조성한 북한산 둘레길 소나무 숲길 1구간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소나무 숲길 1구간은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동학 봉황각과 손병희 선생 묘를 거쳐 박을복자수박물관에 이어 솔밭근린공원까지를 일컫는다. 이곳 북한산 둘레길 1구간 소나무 숲길은 북한산에서 가장 많은 소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박을복자수박물관 정문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니 솔밭근린공원이었다. 아이는 솔밭근린공원에 설치된 그네를 탔고, 산행을 한 탓에 배가 출출해 오후 4시 30분경 덕성여대 인근 식당에서 허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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