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천사
인민민주주의와 생태적 상호부조의 원리에 입각한 자율 지역공동체의 구성과 이들의 연대에 기초한 소국과민의 연방국가를 구상했던 란다우어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 최소화된 꼬뮌을 지향하는 톨스토이적 아나키즘을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궁극적 관계를 사랑으로 설정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이후의 국가가 어떤 공동체 속에서 재출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철학적 모티브를 제공한다.
그가 구상한 정치 기획은 속류적 보수주의자들이 저열하게 공격하는 위험한 공산주의나 급진적 모험주의의 이상에 갇힌 몽상이 아니다. 흔히 유대신비주의로 불리고 있는 ‘카발라적 전통’에 직관적으로 감응했던 란다우어의 국가구상은, ‘빠촘킨 우화’의 수수께끼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엿보이는 카프카 인물들의 독특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무희망성으로부터 나온 희망의 아름다움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벤야민의 미적 테제와 절묘하게 조우한다.
주지하듯이 벤야민은 그 주제를 현대적으로 구현한 카프카의 「이웃마을」을 소국과민의 정체를 가장 핍진하게 묘파한 메시지로 소환해 낸 바 있다. 파시즘이 극에 달할 시기 벤야민은 그런 국가의 소망을 간직하고 그가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했던 ‘아메리카’를 향해 탈출을 시도하다 끝내 좌절되자 스페인 국경 피레네 근처에서 스스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다. 미완의 유고로 남은 「역사철학테제」의 핵심을 관통하는 유대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지배하는 정치적 이상은 그러나 거의 그대로 복원돼 란다우어의 정치 기획과 내밀하게 조우한다.
「역사철학테제」를 관통하는 벤야민의 역사적 유물론과 카발라적 전통으로부터 형성된 메시아적 시간관은 「프루스트의 이미지」나 「카프카」 등에서 엿보이는 탁월한 모더니스트로서의 자질과 절묘하게 결합해, 그를 20세기의 가장 난해하면서 동시에 도달해야 할 휴머니스트로 승화시킨다. 파시즘이 극에 달할 시기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죽음의 광기를 직감한 그는 이 미완의 글에서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통해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이 그림은 솔렘이 최초 소지한 후 보관하던 것을 발터 벤야민이 재구입 20여 년 간직하다 독일 탈출 직전 바타유에게 맡겨졌다. 2차대전 후엔 아도르노 수중에 들어갔다 다시 솔렘에게 돌아간 후 그의 미망인에 의해 1987년 이스라엘 국립미술관에 최종 소장된다).
잔해 위에 잔해를 산더미처럼 더하고 있는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천사는 ‘역사의 천사’다. 그는 이에 대해 조금 더 친절하게 주석을 가한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가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있는 <비상사태>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것이) 20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는 놀라움은 결코 철학적 놀라움이 아니다. 이러한 놀라움은 그러한 놀라움을 생겨나게 하는 역사관이 지탱될 수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인식의 출발점이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타협주의는 그들의 정치적 전략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경제관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후에 사회민주주의가 겪는 파국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이 타협주의다. 시대의 물결을 타고 나아간다는 생각만큼 독일의 노동계급을 타락시킨 것은’ 없다. 그 타락에 대한 직시가 그로 하여금 ‘역사적 인식의 주체는 투쟁하는 피지배계급 자신’이라는 역사적 신념에 도달하게 했다.
란다우어는 노자가 이미 언명한 바 있듯, 자연의 본질은 인간의 오염된 언어로 재현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 인식의 기의는 노자의 무위 개념에 근접한 것이다. 카발라적 전통에서 기원한 유대신비주의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오염된 언어에 대한 그의 근본적 회의는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를 통해 강력하게 모의한 것처럼 메시아적 시간관으로 수렴된다. 그에게 있어 시간의 흐름은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과 유사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는 영적인(Psyche)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인간의 사회적 생태는 ‘주체적 되기’(질 들뢰즈)로 나아갈 수 있고, 또 생명의 부단한 ‘생성’(das werden)을 향한 작은 희망이 될 수 있다.
그가 이런 정체성을 모태로 현실정치의 구체적 구상에 적용한 것은 인간과 인간을 잇는 사회적 생태를 상호부조의 원리에서 찾는 마을꼬뮌의 한 형태였다. 현대국가에서 많은 인간무리들이 현시적 욕망의 최대 과업으로 생각하는 권위, 혹은 권력을 그는 ‘자유와 귀속성의 합일’의 명제로 규정한 공동체의 질서를 형성하는 원칙을 위한 과정으로 이해함으로써, 근대국가의 제도와 체제에 근본적인 회의를 던진다. 반면 자유와 평등을 두 축으로 한 공동체는 상호주의에 입각해 훨씬 능동적으로 직업이나 단체를 결성하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주체적 의견을 개진하게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주민의회 성격의 커뮤니티가 조직됨으로써 새로운 참여민주주의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
란다우어는 소개한 일련의 흐름에 의한 자연스런 정치 과정을 진정한 공화국의 출발로 생각했다. 이런 정치의 현대적 모습을 그는 노르웨이와 스위스의 마을공동체에서 발견하고 있는데, 주지하듯이 전자는 독자적 사회민주주의 제도를 구성해 운영함으로써 오늘날 전 지구촌에서 가장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구가하는 최상위 국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후자 또한 협의체 민주주의라는 창발적 정치체를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야만적 강대국 사이에 끼인 작은 국가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속가능한 높은 단계의 생태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은 현실정치와 현대국가의 정치구조에서 상호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두 국가를 통해 우리는 이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다는 모멘텀을 마련할 수 있다. 란다우어가 두 국가의 특징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에서 찾는 과정에서 주목한 것은 아나키였다. 그의 아나키에 대한 이해는 협소한 프레임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아나키의 핵심 가치인 생명활동을 촉진하는 과정으로서의 문화운동, 내면의 지침으로서의 무위적 정념을 포괄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일례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정치적으로 연방주의를 아나키와 긴밀하게 호응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공동체의 이익과 삶의 안위를 가치의 정점에 두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이념으로 자유와 평등을 주요한 기율로 하는 연방제 정치는 실현가능한 아나키의 정치적 이념이 된다.
그의 아나키적 정치이념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은 크로포트킨이다. 그는 사회투쟁의 변증법적 진보를 주장한 마르크스나 시장자유주의를 주장한 자본주의를 전면 부정하면서 종의 진화에 투쟁보다 상호부조가 훨씬 경제적이며 근본적인 삶의 준거가 된다는 생물과학적 추론에 이르게 되는데, 사회와 자연에 대한 그의 분석과 판단은 ‘상호부조와 상호연대를 통해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생태 조건이 창출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바쿠닌이나 슈티르너 등이 추구했던 폭력 혁명으로서의 아나키를 비판하고, 그것을 문화운동의 정초로 이해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아나키를 특정한 정치이념이나 현실의 정치체제로 한계 지우는 규범으로부터 초월해, 메시아적 시간관이라고 말했던 미적 기율을 통한 생태적 지속의 조화로운 삶을 인간과 그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인간 가치로 삼는 것에 가까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나키를 혼돈이나 무질서로 규정하는 아류 문화주의나 자유주의 아류 근대주의자들과 달리, 한 실존과 그 공동체가 새롭게 태어나고 창조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한 자기 해체의 과정으로 인식했던 레비나스에 근접한다.
폭력을 배제한 아나키를 구상했던 그가 주목한 인물은 톨스토이였다. 란다우어는 톨스토이가 몸소 실천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유일한 원리로서의 사랑을 아나키의 주요한 이념적 지표로 생각했다. 톨스토이가 그의 말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실현한 러시아 전통 촌락공동체 속에서의 인간적 연대를 향한 연민과 사랑의 여정은 그 자체로 이미 판차야트(마을공화국)의 전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희망없는 희망
『폭풍 다음에 불』(존 홀러웨이)은 무희망의 희망의 ‘동시대-여기’ 버전이다. 그렇다는 점에서 그의 메시지는 벤야민과 란다우어의 그것에 튜닝된다. 조금 더 직관적으로 존 홀러웨이는 불가능의 정치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공허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그가 화폐의 부정과 희망없는 희망으로서의 혁명을 주장할 때 우리는 외면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한 화폐가 신자유주의 이념과 정치적 기획으로 전개된 현재의 미·영 중심 포스트자본주의(신자유주의) 폭력이라 하더라도 화폐는 쉽게 부정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좀 거칠게 말해 화폐는 제도로서의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인류사의 멀고 긴 사회적 진화와 함께 해온 주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의 시급성과 급진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현재의 자본주의 이후를 현실적으로 대체할 묘안을 아직 상상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화폐는 단순히 교환수단으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이상의 더 복잡한 역사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 욕망의 표현 수단이 그것이다. 섹스가 본원적 인간 욕망의 리비도와 등가성을 띠고 있다고 할 때, 화폐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화폐에 내재된 유사 본원적 욕망은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형식으로서의 교환 욕망을 능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존의 주장은 그가 지향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의미로서 신자유주의 정치가 구사하는 화폐 권력의 폭력에 맞서는 유일한 길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본-권력에 포획돼 압사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자본주의=화폐는 다른 형태로 증식되거나 변형된 몸을 취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니까 근시안적 비전으로 대항 권력으로서의 자본주의 폭력에 대한 그의 대안은, 어떤 크기의 공동체와 함께하는 화폐로 문제를 좁혀야 한다.
마을 공화국으로서의 아나키, 나아가 에코아나키있다. 그 공동체의 화폐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역화폐 같은 형식이다. 그것을 위한 대안 기획으로 우리는 존이 『크랙 캐피털리즘』에서 주장한 일상의 정치의 한 방식으로 ‘크랙’의 개념을 포획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의 삼부작 핵심이 두 번째 저작에 있다는 판단이다. 그의 ‘크랙’ 개념을 나는 그가 주장하는 정치적 타겟을 정초하는 코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 징후적 개념이 그의 다른 여러 언술 들 중 훨씬 핍진성이 높다. 나는 크랙을 정치적으로도 가장 현실에 충실한 리얼리티를 확보한 개념으로 수용한다. 그런 면에서 크랙을 나는 내가 재개념화한 무위와 교환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다 알듯이 무위는 최제우의 동학을 통해 19세기 이 땅 인민에게 주요한 미적 감응으로 수용된 개념이다. 최초에 무위는 노자의 심미적 이상으로서의 ‘무위자연’, 정치적 거버넌스로서의 ‘무위무불치’, 무목적의 합목적성으로서의 ‘무위’등으로 해석돼 오다, 최제우가 동학문에 이를 기입하면서 ‘조화 무위이화’로 주석하고, 다시 최시형이 혜안으로 ‘조화 현묘무위’라고 재구성하면서 종교적 범주를 넘어 시대의 이상으로 인민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최시형에게 무위는 정치적 에너지로 현존하는 잠재태다. 동학의 접-포-법소 형태의 조직을 내밀하게 움직이는 코어에 무위의 정동이 있다. 그리고 이는 이 공동체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인민 공동체의 결속과 삶의 실재에 풍속의 형태로 개입해 온 계(契)나, 미륵(彌勒), 아리랑, 비빔밥의 스타일과 근친 간이다. 그러니까 무위는 공동체의 기율을 역사적으로 관통하는 정서(affectus)를 정초하고 있는 이념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매우 은밀한 형태로 인민의 정서에 내재돼 있다는 점이며, 한편 정치적으로 인민의 결집과 봉기의 형태를 띨 때 강한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동학인민봉기가 증거한 바 있다. 무위는 리비도로, 내면의 정동으로, 역사적 공동체의 교감 형식으로 내재하는 무형의 스타일이다. 우리는 존이 그의 책 곳곳에서 언급한 크랙이 무위와 교감하면서 나아가 현대 일상정치의 전위개념으로 핍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예감을 해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주장한 크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탐구이고 창조’이기 때문에, ‘균열을 내는 것은 닫힌 것으로 나타나는 세계를 여는 것’이며 ‘그것들의 표면에서 인간 행위의 역량을 부정하는 범주들을 열어서, 그것들이 부정하고 감금하는 행위를 그것들의 핵심에서 발견하는 것’이자 ‘맑스의 용어로 그것은 대인적(ad hominem) 비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사물세계의 현상들, 그리고 통제불가능한 힘들의 현상들을 돌파하여 세계를 인간 행위의 역능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런 ‘균열의 방법은 명제, 반명제, 종합명제의 말쑥한 흐름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부정적 변증법, 부적합의(misfitting) 변증법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부적합에서부터 사유’한다. 그런 이유로 ‘균열은 혁명의 길로 가는 한 걸음이 아니라 바깥으로의 열림’이다. 그것은 ‘어두운 밤을 비추는 존엄의 등대이며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에게 반란을 알리는 라디오 송신기’이다. ‘크랙’이 무위와 교감하며 인민의 내면에 혁명의 잠재태로 앙금화되어 있는 에너지인 이유는 ‘그것이 폭력적으로 진압될 때 조차 그것은 결코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는 것과 깊이 관련돼 있다.
역사적으로 ‘파리 코뮌은, 그 참가자들의 상당수가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있다. 그것은 영감이며 상환되지 않은 부채’이다. ‘1968혁명도 계속 살아’ 있다. 크랙의 궁극적 목적은 ‘성자들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상이한 관계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순수성이나 청교도주의에 기초할 수 없다. 그것들을 자기희생의 이념에 정초하려는 시도는 재앙적이다. 만약 그것들이 매혹적 공간/순간이 아니라면, 만약 그것이 자석같은 인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결코 균열 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확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특별히 존 홀러웨이는 화폐의 기술에 의존하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추상노동으로 규정한다. 그 노동을 멈추게하고 자본주의를 폐지할 유일한 구체노동, 구체 행동은 거기에 구멍을 내는 균열뿐이다. 그런 점에서 크랙은 현재를 사는 모든 인민의 생명선이다. 폭력과 절망이 누적되고 있는 이 공동체에서 희망없는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위일지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답도 없다. 어떤 답도 있을 수 없다. 어떤 답도 없어야 한다. 답은 닫힘이고 희망은 열림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행복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어떤 결말도 없다. 기껏해야 시작이 있을 뿐이다’라는 메아리만 가득하다.
영구혁명
세 권의 책-『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크랙 캐피털리즘』, 『폭풍 다음에 불:희망없는 시대의 희망』-을 난독하며, 혹은 속(숙)독하면서 사유의 교정이 즉흥적으로, 여러 갈래로 일어났다. 그 흐름에서 가장 먼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역자 조정환 님이다. 그의 글쓰기 초기 스타일에 대한 몇 아득한 기억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번에 그의 이런저런 번역 문맥들을 탐색하며, 그가 그간의 굴곡진 경험과 공부의 여정에서 어떤 자기 도야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가 존 홀러웨이가 기입하고 있는 ‘희망없는 희망’과 관련한 친숙한 개념에 어떤 결의 튜닝을 시도했을 행간의 체취를 그래서 뜸을 들이며 생각했다.
내가 속독이나 난독의 결례를 범하면서 리뷰 형태의 글쓰기를 진행하기로 마음 다잡은 궁극적 계기는, 무엇보다 존 홀러웨이-조정환의 ‘희망없는 희망’ ‘크랙:균열, 틈, 사이, 더 나아가 박명이나 미명, 그것들의 총합으로서의 무위와의 겹침, 혹은 교환가능성’ ‘국가(주의)의 해체-국가없는 국가, 국가이후의 국가’에 대한 일말의 교감-숙의 가능성 때문이다. 나는 이 작은 틈으로 난 크랙의 숨구멍에서 그 둘이, 이 세계가 가고 있는 희망없는 희망의 맹아를 생각한다.
대체로 존 홀러웨이는 세 권의 책에서 일정한 단문 형식의 문장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떤 강렬성과 관계한다. 나는 그의 그것이 마음의 조급성과 관계할지 모른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는데, 그렇다면 그의 현 단계 자본주의를 향한 저항과 싸움은 지칠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그가 그것에 반하여 긴 싸움을 주문할 때도 그 효과는 반감된다. 대체로 그가 주장한 ‘크랙’은 ‘희망없는 희망’과 근본적으로 관계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구혁명을 향한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일상의 정치는 그래서 우리의 삶 깊은 곳으로 정치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직장에서, 거실에서, 밥상 앞에서, 화장실에서, 마침내 은밀한 잠자리에서까지도 우리의 정치를 가동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정치는 마침내 우리의 삶 자체가 된다. 흔히 말하는 전문가 정치가 아닌 아마추어의 정치, 제비뽑기의 정치, 놀이의 정치가 그래서 요구된다. 아마도 이 과정 안에서만 겨우 영구혁명의 정초를 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존의 정치적 비전과 구호들은 아직 삶의 실제에 밀착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부기; 존 홀러웨이의 화폐, 자본주의, 추상노동, 국가(주의)폭력 등의 거대서사에서 소외된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알고도 외면했거나 뒤로 미뤘을 가능성이 있는데, 하지만 나는 이 문제가 그의 삼부작 어디인가에 기입되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 단계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과 관련하여] ‘가족’(family)의 제도적 기원은 화폐 이상으로 길고 강고한 시스템이다. 남한의 경우 현재 일인가족(구)이 대세를 장악해 가고 있는데, 이는 자본의 폭력에 의해 변형된 가족주의 시스템이자, 자본에 나쁜 형태로 상호 영향을 주는 새로운 가족 제도의 무엇이다. 문제는 이 패밀리 제도가 현 단계 국가의 주요한 기율을 토대하고, 그 국가의 이념을 매개하는 리비도라는 점이다.
존이 주장하는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주요한 코어에 가족제도를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의식의 출발이라는 점을 첨언하고 싶다. 다른 하나, ‘교육’. 역사적으로 모든 교육은 체제지향적이다. 어떤 반체제 교육도 체제를 더 강화하는데 결국 기능해 왔다. 그런 면에서 특히 ‘지금-여기’의 교육은 화폐=자본주의를 작동하는 또 하나의 기율이다.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열외 된 존의 주장이 궁금하다.
* 글쓴이 신철하는 에세이스트, 영화산책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