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이 풀린 세상에 다시 마법을 거는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1)
의사이며 암 투병자이기도 했던 아서 W. 프랭크의 저작인 『몸의 증언』(2013)이 현시대를 반영한 제목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2024)로 재출간됐다. 출간 당시 『몸의 증언』이라는 제목은 ‘몸’에게 명확한 자리와 목소리를 준다는 의미에서 인상 깊었다. 개정판 제목인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는 ‘하기’라는 행위를 부각하며, ‘아픈’ 몸이라는 조건을 강조한다.
고독사, 돌봄, 고령화 등의 이슈가 어느 때보다 부상한 지금 아픈 몸을 말할 땐 그만큼 윤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고령화를 막기 위한 정책적 전략이나 돌봄‘서비스’ 공급 인력 확보만이 중요해지고, 개인의 극복담만 남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열악한 돌봄 노동자와 돌봄 받는 자(특히 가난하고 ‘비정상적이라고 분류되는’)의 위치성이나, 돌봄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관계 양상, 통증, 질병, 차별과 낙인은 감춰진다.
스토리텔링의 의미화
저자는 아픈 몸을 가진 이들을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로 명명하며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윤리적으로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은 끊임없이 이를 사회적(53)인 것으로 위치시킨다. 저자에 따르면 스토리텔러의 스토리텔링은 모더니스트 의학의 질병 대 건강함이라는 이분법적 분리와 의학적 텍스트의 식민화와 임상체를 거부하는 것이자(68)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인식하는 포스트모던적인 과정이다(63). 즉 의학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작업인 의미화는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저자는 타자와의 연관성, 몸의 연관성, 통제, 욕망을 기반으로 하여, 훈육된 몸, 지배하는 몸, 반영하는 몸, 소통하는 몸이라는 몸의 4가지 이념형을 만든다(98). 훈육된 몸은 자기-규율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며(117) 비추는 몸은 소비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정의한다(120). 지배하는 몸은 힘을 통해(때로는 타인을 지배하는 힘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이 중에서도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소통하는 몸인데 이는 이상화된 유형이기도 하다(128).
소통하는 몸은 우연성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과 완전히 결합하여 몸-자아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는 상태이다(129).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의미화된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달한다. 스토리텔링의 의미화에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몸(스토리텔러)과 듣는 몸(타자 혹은 사회)의 사이의 매개체가 되는 교감하는 이야기다.
고통에서 쓰인 연대의 씨앗, 이야기
최근 돌봄과 아픔, 통증 등을 다룬 에세이 형식의 출판물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자신들의 삶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독자들의 존재를 의미화하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스토리텔러들은 몸의 기능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의학적인 모더니티의 폭력을 넘어서(168) 자신의 이야기를 찾는다. 이러한 이야기를 저자는 몸과 자아가 결합한 “자아-이야기”(167) 라고 표현한다. 저자는 아픈 몸의 자아 이야기는 아픈 사람의 서사와 진실, 경험을 통해 말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149).
스토리텔러의 이야기가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로만 구성되느냐는 질문 앞에서 ‘그렇다’고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순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자신이 경험한 ‘고통’(168)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유방암에 걸린 윌리엄스는 자신의 많은 여성 가족 구성원이 자신처럼 유방암에 걸렸었던 사실을 깨닫고 가족사를 탐구한다. 이때 윌리엄스는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질문하는 것을 넘어서 왜 자신의 ‘주변’에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지 질문한다.
이야기를 탐구하던 윌리엄스의 기억의 끝은 밝은 불빛과 그 불빛의 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그 장면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원자폭탄 실험을 보기 위해 하늘을 바라봤던 1950년대의 어느 날이다(166~167).
물론 정확한 질병의 인과관계를 밝히기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이러한 에세이적 기억 찾기, 고통에서 출발한 역사적 회고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목소리 끝에 원자 폭발로 고통을 겪은 다른 여성들의 울음을 덧입힌다. 윌리엄스는 자신의 고통에서 시작하여, 자기 가족과 사회적 사건과 고통, 그리고 죽어간 여성들을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고통과 아픈 몸의 말하기에서 시작한 희미한 연대의 불을 밝힌다.
서사를 통한 연대는 정말 가능한가?
저자는 『몸의 증언』(2013)에서 이야기를 복원의 서사, 혼돈의 서사, 탐구의 서사로 분류한다. 개정판에서는 저자의 영어판 후기가 보충되었고 정상적인 삶 서사, 빌린 이야기, 부서진 서사를 더 찾아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혼돈의 서사가 웅얼거림, 난파선 같은 서사라면 이번 개정판에 추가된 부서진 서사는 스토리텔링 능력에 필수적인 말하기, 기억력 등의 기능이 저하된 경우를 가리킨다.
저자는 부서진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377). 알츠하이머 등으로 인해 정확한 단어로 경험을 말할 수 없는 경우, 또한 음성언어와 청각 기능이 작동할 수 없는 경우 서사는 어떠한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 실화를 다룬 영화 <잠수종과 나비>(2007)는 뇌졸중을 겪은 인물이 눈 깜빡임으로 어떻게 자신의 서사를 전달하는지를 아주 느리게 보여준다. 그 옆에는 그 눈 깜빡임에 집중하는 누군가가 있다. 바로 눈 한 번 깜빡임에 A, 눈 두 번 깜빡임에 B... 로 쓰인 주인공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잠수종과 나비>가 만들어졌다.
혼돈의 서사와 부서진 서사를 병렬하여 설명하기도 했지만, 저자는 그 두 가지가 명확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혼돈의 서사는 “말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혼자라고 상상하며, 어떠한 협력자도 없다는 것”이 조건이지만 부서진 서사는 “스토리텔링을 가능하게 해주는 협업을 전제”한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2018)라는 책에서 고통받는 자의 말하기의 어려움을 언급한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의 돌보는 사람들인 “곁”에게 고통받는 자의 고통이 전달되어 다 같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엄기호는 책의 말미에 그 “곁”을 지키는 또 다른 “곁”인 사회안전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의 스토리텔링은 서사를 이어 붙이고, 전달하고, 경청하는 누군가의 협업, 곁과 곁이 필수적이다.
저자의 말처럼 스토리텔링을 통한 연대는 얼마만큼 가능한 것일까? 물론 낙관적이지는 않다. 저렴한 돌봄 노동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만든 외국인 가사관리사 정책에서 정말 윤리를 찾아볼 수 있는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와 분리된 시설에 갇혀 숨을 거둔 이름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부과한 침묵에 저항하며 목소리를 발견한 스토리텔러의 힘은(351) 도덕적 증인으로 나타나며 우리에게 우리가 잊고 온 우리의 빚과 의무, 그리고 몸의 증언으로 성장하는 공통의 힘을 선물한다(355). 윤리적 책무와 역할은 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을 받아 적고 듣기 위한 잠시 동안의 멈추기를 통해 성장한다.
결국 우리는 스토리텔링에 동참할 때, 윤리적으로 숨 쉬며 살아간다.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는 바로 윤리적 힘을 기르고, 곁이 되기 위한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내는 씨앗이다. 비관과 경쟁이 치열해지는 이때 아픈 사람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것,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저자의 당연한 말은 위로가 된다.
1)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355쪽에 나온 표현입니다.
* 글쓴이 박서연은 다중지성의정원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