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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로 한글 배워 눌러쓴 '구순' 할머니의 세상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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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관
기사입력 2023-11-06

▲ 표지  ©


딸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됐고, 어려웠던 가정 형편에 배우지 못했던 봉순 할머니. 8남매를 키우고 난 후, 고희(古稀)가 된 73살에 한글을 배우기 위해 지역 문예반에 입교했다.

 

‘낫놓고 기역(ㄱ)자도 모른다’는 속담처럼 실제로 그랬던 그가 자식을 키우고, 8남매 모두 결혼시키고 난 후에야 한글 배우기에 나섰다. 이전에도 어설프게나마 글을 알았다고 전해졌다. 현재 구순을 넘긴 할머니가 일상을 72권이나 되는 일기장에 담았다. 이 일기는 풀뿌리 지역신문인 전북 <진안신문>에서 12년째 연재를 하고 있다고.

 

구순의 ‘봉순 할매’의 책을 읽고 돌아가신 모친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부재(不在)의 실재(實在)를 느꼈다고나 할까. 비현실이지만 현실처럼 존재하는 모친의 모습이 생경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후배가 책을 놓고 갔다. 아니 나에게 줄 정년 감사패와 프린트 잉크를 담은 쇼핑백에 두툼한 한 권의 책이 나왔다. 노동조합 활동보고서 같은 디자인의 두꺼운 책(395쪽)이었다. 지난해 말 정년퇴직을 해, 요즘 소일거리로 책 읽기를 주로 하고 있는 터라, 이것을 알아차린 후배가 건넨 물건에, 덤으로 선물을 주고 간 것이다. 바로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늦깎이로 배워 눌러 쓴 봉순 할매 일기>(2023년 6월 30일, 진안신문)였다. 봉순 할매가 쓴 서문을 읽고 돌아가신 모친이 생각나 밤샘 읽었다.

 

이 책의 주인공 송봉순(91) 할머니는 1933년 5월 4일 계유년(닭띠)에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월운마을(수선루)에서 부친 송백수와 모친 박우연 슬하에 4남 5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7살 때, 옆 마을에 사는 5대 독자인 1931년 신미년(양띠)에 태어난 조동관(93)할아버지와 결혼해 슬하에 8남매(5남 3녀)를 두었다. 이 책은 송봉순 할머니(봉순 할매)가 이순(耳順)인 66세부터 쓴 일기를 모아 편집했고, 출판한 <진안신문>에서 해설을 달았다. 참고로 봉순 할매가 태어난 연안 송씨의 누정, 수선루(睡仙樓)는 신선이 잠든 정자란 의미로, 신선이 놀 정도로 앞뒤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1927년 정묘생(토끼띠)인 나의 모친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지난 2011년 4월 21일에, 1930년 경오생(말띠) 부친은 올 4월 1일 향년 92세로 영면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같은 시대에 태어나 시골 생활을 했던 모친과 함께 했던 비슷한 환경들이 떠올랐고, 특히 고인이 된 모친이 많이 생각이 났다.

 

언제부터 한글을 익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봉순 할머니가 첫 일기를 시작한 날은 66살 때인 1998년 3월 28일이다. 우연히도 나의 주민등록상 생일과 같은 날이어서 퍽 인상적이었다. 날씨가 맑은 토요일이었고, 큰딸 내외와 큰아들 내외가 온 날의 일기였다. 당시 국가적으로는 IMF 외환위기 시기였다.

 

“오늘은 큰딸이 왔다. 사위도 왔다. 무주에서 큰아들 큰며느리 전익 영익 무주에서 왔다. 그래서 호박떡하고 찰밥도 맛나게 했다.” - 본문 중에서

 

당시 큰딸은 48살이었고 큰아들은 40살이었다. 선익과 영익은 큰아들이 낳은 친손자로 보인다.

 

봉순 할머니는 2005년인 73살에 한글학교에 늦깎이로 입학해 정식 한글을 배운다. 그리고 2010년인 78살에 며느리한테 첫 편지를 쓴다.

 

“큰며느리 에게 편지 받아 보아라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지나가고 벌써 눈이온 겨울 돌아 왔다 미장원 갈 때 마스크 하고 장갑 찌고 몸따 뜻하게 잘하고 다녀라 몸이 큰재산이다 열심히 살아준개 고맙다 언제나 우리 큰며느리는 믿음직하다 돈없는 집으로 시집와서 고생 많이 한다 그리고 부모님에게도 잘하고 형제간에 도 잘하고 그리고 큰며느리는 백프로 다잘하고 있다 그후에 더바라 것 없다 내가 나가면 큰며느리 잘한다고 칭찬받는다 나가면 기분이 좋다 우리 큰손자도 잘하고 큰아들도 잘하고 나는 다니면 칭찬을 많이 받고 다닌다 큰며느리가 고추도 팔아주고 김장하는데 돈도 주고 큰며느리가 다했다 그리고 시어머니 무릅 아플 때 우리 큰며느리는 많이 욕받다 2010년 12월 2일 새벽 두시씀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원강정리 132번지 송봉순” - 본문 중에서(글을 그대로 인용)

 

79살인 2011년 7월 11일부터 할머니의 일기는 <진안신문>에 연재를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가 나이가 먹고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 보고 싶은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언제나 봐도 보고 싶은 우리 어머니. 한 번만이라도 소원이 없겠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천리를 가셨는가. 만리를 가셨는가. 지금 같이 좋은 세상 옆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어머니 하늘나라 천당으로 가실 줄로 믿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분이라서 우리 형제 구남매, 우리 어머니는 부지런하시고, 깨끗하게 잘 키워 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옆에서 자라 94세가 된 어머니를 보고 싶으면 밤에도 마다 않고 달려가지요. 비가 오면 우산 받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가면 반가워서 ”어서 오너라“ 무거운 이불을 덮어 주며 다독여 주시든 우리 어머니. 정말 보고 싶어요. 2016년 7월 18일”- 본문 중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누구에게나 중요하듯, 봉순 할머니의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도 심금을 울릴 것으로 보인다.

 

송봉순 할머니는 책 서문을 통해 “앞으로도 열심히 배워서 저승에서라도 글을 잘 읽었으면 해요, 끝없이 죽을 때까지 배우렵니다, 공부 잘해서 다른 사람처럼 활발하게 살고 싶어요. 그것이 소원이네요”라고 밝혔다. 남편 조동관(93) 씨도 “우리 집사람은 성실하고 배움의 열정과 끈기가 있다, 생을 마갈 할 때까지 건강하게 생활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고, 장남 조준열 씨는 “어머니는 용기와 인내심, 배우고 싶은 열정이 강했다”라고 전했다.

 

김명기 마령면장도 “우리 면에 이렇게 대단한 분이 계신다는 게 무척 자랑스럽고 기쁘기 한량없다”고 했고, 최규진 마령면 주민자치위원장은 “일기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마음을 정화시키고, 지혜를 배우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극찬했다. 김순옥 <진안신문> 발행인은 “처음 글을 배우고 쓴 글이라서 투박해 보이지만 그 글들은 어르신들이 살아온 인생을 꿰뚫고 있다”며 “글 속에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도 있다”라고 피력했다.

 

송봉순 할머니는 지난 2019년 3월 18일 초등학교 과정에 입학해 2022년 2월 8일 전라북도 교육감으로부터 학력인정서를 받았다. 1971년 원불교에 입교해 35년 만에 ‘산타원’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2005년(1~12월 과정) 마령 은빛문해반에 입학해 수료했다. <진안신문> 연재 후인 2016년 11월 EBS ‘장수의 비밀’, 2017년 4월 KBS ‘6시 내고향’. 2018년 5월 KBS 1TV ‘전북투데이’에 출연했다. 그는 모범적인 주민으로 전라북도 교육감, 진안군수, <진안신문> 대표, 진안군 주민자치협의회장 등 표창장과 상장을 받았다.

 

이 책을 출판한 풀뿌리지역신문 <진안신문>은 1999년 10월 1일 창간했다. 2021년 7월부터 진안, 무주, 장수 쪽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다뤄가는 무진장 신문방송(유튜브)을 운영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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