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때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을 우리 글자인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해야 나라가 일어난다고 믿고 한글을 살려 쓰려고 애썼지만 1910년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그러나 주시경은 그 꿈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 말모이를 만들고 최현배, 김두봉, 김윤경, 장지영 같은 훌륭한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다가 주시경이 1914년 39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그 운동이 좀 시들했으나 1921년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연구회란 이름으로 다시 살아났고 그 뒤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한글맞춤법도 만들고, 표준말도 정하고, 우리말 말광도 만들어서 광복 뒤에 우리 말글로 배움 책을 만들어 교육했다. 우리 말글이 독립할 새싹이 돋아난 것이다.
그런데 광복 뒤부터 일본식 한자혼용에 길든 자들이 한글만 쓰기를 반대하다가 5.16군사혁명 정부를 꼬드겨 1964년부터 20여 년 동안 한글로 만들던 교과서를 한자혼용으로 만들게 하고, 토박이말을 살려서 쓰던 말본 용어를 일본 한자말로 통일시켰다. 그래서 한글학회와 한글전용촉진회 들 한글단체가 반대했으나 안 되어 절망 상태였다. 그러니 어렵게 일어나던 우리 말글 독립 꿈이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그 때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백성이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를 지키고 구하려고 하듯이 젊은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한글을 살리고 빛내자고 나타났다. 1967년 서울대(회장 이봉원)를 시작으로 연세대(회장 정중헌). 고려대(회장 박노용), 동국대(회장 이대로)들에서 국어운동학생회가 태어나 정부가 한자혼용 정책으로 가려는 것을 막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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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학생들은 광복 뒤 태어나 한글로 공부한 대한민국 세대들이니 그 정책이 잘못된 것임을 안 것이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1967년 한글날에 대통령에게 한글전용을 하라는 건의를 하고 한자혼용 반대 범국민운동을 하겠다고 나서니 언론이 이 사실을 알렸고 박정희 대통령이 그 보도를 봤다. 그는 “대학생들이 군사독재정부 물러가라! 한일회담 무효다!”라고 시위를 해서 머리가 아팠는데 또 다른 대학생들이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모임을 만들고 나섰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깜짝 놀라서 비서에게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고 비서는 대통령 문화정책 자문 특보였던 이은상 선생을 청와대로 불러 대통령에게 설명하도록 했다. 이은상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생했던 분이고 한글학회 사람이니 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은상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 “당신은 누구를 존경하느냐?”고 물으니 박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고 대답을 했고, 왜 그분들을 존경하느냐고 물으니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든 분이고, 이순신 장군은 일본 침략을 막은 분이라 존경한다.”라고 대답하고 더 자세한 것은 몰랐다. 그래서 이은상 선생이 “그 분들의 훌륭한 업적과 정신을 지도자는 말할 것이 없고 온 국민이 알고 이어가야 튼튼한 나라가 된다. 그런데 그 분들을 제대로 알려면 세종실록과 난중일기를 읽어야 하는데 그 책들이 한문이라 읽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충무공이 쓴 난중일기를 국역하고 있는데 한문을 많이 안다는 나도 어떤 때는 한 장을 가지고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 빨리 한문으로 된 옛 책을 국역하고 한글전용을 시행해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학생들 말을 들으면 훗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처럼 존경받는 역사 인물이 될 것이라며 한글전용을 해야 함을 설명하니 박 대통령은 한글전용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어서 한글 붓글씨를 잘 쓰고 말을 잘하는 한글학회 한갑수 이사가 한글로 그 당시 군인들이 좋아하는 도표(차트)로 한글전용 5개년 계획안을 만들어 가지고 설명하니 박 대통령이 비서에게 “그대로 빨리 시행하도록 하지.”라고 말해서 1968년 3월 18일에 앞으로 한글전용정책을 점차로 시행하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래서 서울대, 연대, 고려대, 동국대 국어운동대학생회는 바로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4월 27일에 4개 대학이 동숭동 서울문리대 마로니에 광장에 모여 한글전용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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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결의문 수천 장을 공병우 박사가 한글타자기로 찍어주어서 결의대회를 마치고 학생들은 서울 명동과 광화문 네거리, 종로에서 그 결의문을 뿌리고 가게를 돌며 한글간판 달기 가두 계몽까지 했다. 그 결의대회 때 한국방송(KBS) 인터뷰를 학생 대표로 내가 했는데 나는 “한글이 태어나고 500년이 넘었는데 왜 한글은 좋은 글자라고 가르치면서 공무원들은 한글전용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느냐.”고 말했고 그 목소리가 낮 12시 뉴스부터 저녁까지 뉴스시간마다 나왔으며 그날 행사로 여러 신문들에 보도되었다. 그날 행사를 마치고 종로에 있는 식당 ‘한일관’에서 정인섭 교수를 모시고 말씀을 들었는데 정 교수는 강연을 마치고 애국 청년들을 만나니 마음 든든하고 기분이 좋다며 우리 민요 아리랑까지 불렀다. 그리고 모두 굳게 뭉쳐서 승리하자고 다짐했다.
그 뒤 박 대통령이 한갑수, 정인섭 선생들과 한글단체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1974년까지 단계로 한글전용을 하겠다고 말하니 정인섭 교수가 당장 실시하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어운동대학생회는 한갑수, 정인섭 교수들을 모시고 서울과 청주 들 지방까지 돌면서 한글사랑 전국 순회 강연회도 열고, 국민 여론조사를 하면서 1968년 한글날에 전국국어운동대학생연합회(회장 이봉원, 감사 이대로, 지도교수 허웅)를 결성하고 덕수궁에 세운 세종대왕동상에 꽃을 바치는 행사를 하면서 한글전용 촉구 성명서를 발표하니 모든 언론이 크게 보도했다. 그리고 조직을 확장해서 모임이 전국에 16개 대학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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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태어나고 500년이 넘어서 교과서도 한글로 만들고 한글나라를 만들려는데 일본 식민지 교육을 받고 일본식 한자혼용에 길든 이들이 군사정권과 손잡고 일본식 혼용 정책으로 가려고 해서 한글단체와 한글을 사랑하는 국민이 절망스러워할 때에 구원투수로 젊은 의병이 나타나 다시 한글을 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은상 선생이 박 대통령에게 직접 잘 설득하고 한갑수 이사가 잘 설명해서 한글전용 정책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이때부터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글운동에 앞장서서 참여했기에 1967년 이은상 선생이 박 대통령을 만난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며 그 당시 일을 한갑수, 정인섭 교수를 모시고 활동하면서 직접 듣고 확인한 비화를 밝혔다.
* 지금까지 [한글 살리고 빛내기] 20회까지 연재 글은 세종대왕과 선배들 이야기를 썼지만 앞으로는 내가 1967년부터 55년 동안 한글단체와 함께 한글운동에 참여 활동한 사실을 바탕으로 느낀 일과 비화까지 좀 더 자세하게 적어 후배들이 활동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되고 한글운동역사로 남도록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