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 쓰러지기 전 몇시간 전 우연히 모친을 촬영했다. 2010년 12월 18일 점심 먹고 난후, 한 시간 후 쓰러졌다. © 김철관 | |
팔순을 넘기고 건강하게 활동했던 모친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다.
지난 2010년 12월 18일(토) 오후 2시 30분경 모친이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아파트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모친과 평소 좋아했던 고등어 생선을 프라이팬에 함께 구워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갑자기 쓰러졌다. 천청병력이었다. 마침 토요일(휴일)이라서 직장을 나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출근을 했었더라면 모친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모시고 살아 너무 슬펐다. 다행히 119로 병원에 도착해 생명에 지장이 없게 됐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 응급실에서 중환자실-> 집중치료실-> 일반병동으로 옮기는 과정을 거치니 약간의 차도가 있는 모양이다.
평소 모친은 끼니를 시간에 맞춰 잘 챙겨 드셨다. 돼지고기, 닭고기, 커피, 밀키스, 설탕, 사탕 등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단 음식과 커피를 너무 좋아했다. 이런 음식들이 모친을 쓰러지게 한 원인이 아닌지 문뜩 생각이 든다.
어쨌든 집중치료실(준 중환자실)에서 모친을 간병할 때이다. 기저귀에 배설물을 쏟아 내고도 시치미를 떼고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짓고 있으니 배설물을 배출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약간 냄새가 나 기저귀 안을 살펴보니 쑥색 배설물(설사)들이 은덩이 고여 있었다. 기저귀를 빼 내고, 휴지와 물휴지로 닦아내고 새 기저귀를 갈면 미안해서인지 모친은 사푼히 눈을 감는다. 모친의 기저귀를 갈 때면 내가 아기 때 모친이 기저귀를 갈아 주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모친은 여섯 자식을 매일 기저귀를 갈면서 키웠을 것이다. 여섯 자식을 거뒀을 터인데, 이제 한 두 자식만 모친 곁을 지키고 있다. 한 두 자식도 어쩔 수 없어 억지로 간병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옆에 있는 간병인 한분이 “부모는 열 자식을 거둬도 한 자식이 부모를 거두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는 말을 한다. 간병인에게만 맡기고 찾지 않는 자식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맞는 말인 듯했다.
모친은 아직도 입으로 밥을 먹지 못한다. 코로 영양식을 공급해야 하는 모친이 안타까울 뿐이다. 함께 병실에 있는 환자들이 모두 밥을 먹으니 그 모습을 본 모친이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혼자 영양식을 코로 넣고 있기 때문이다. 빨리 입으로 식사를 해야 할 터인데 하는 바람이다.
병원 생활은 가족에게도 큰 어려움이었다. 직장이 있는 형제들이 모친을 돌보기란 무척 힘이 들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다들 지방에 살고 형수 또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간병인을 고용해도 모친이 꺼려하는 눈치였다. 기저귀에 똥을 누어야만 하는 환자로서, 남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은 모양이다. 심전도 검사기, 링거, 영양제, 산소, 약 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친을 보니 마음이 안타깝다.
▲ 병석에 누워 있는 현재의 모친. © 김철관 | |
모친 함자는 송문엽(宋文葉) 여사다. 정묘년인 1927년 음력 5월 22일생(토끼띠)으로 올해 85세이다. 지인들은 위로라 치고 살만큼 산 연세라고 한다. 또 영면하더라도 호상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평소 병원 한번 가지 않고 건강했던 모친이기에 그 말을 쉽게 받아 주기가 힘들다.
모친은 평소 혈압이 높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눈치 채지 못했다. 워낙 밥도 잘 드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도 잘 다녔기 때문이다. 모친은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 새벽기도를 나간 권사이다. 뇌경색 판정을 받고 나니, 혈압계를 비치해 가끔 체크만 했어도 쓰러지지 않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미 물 건너간 꼴이 됐다.
며칠 전 병원에 면회 온 목사님이 모친의 소식을 전해 줬다. 쓰러지기 바로 전날인 지난해 12월 17일 새벽기도를 왔는데 집으로 가지 못해 앉아 있었다고. 그래서 아는 집사 한분이 집까지 모셔다 줬다고 했다. 물론 쓰러진 날 오전에 모친이 얘기를 했다. 내가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 실수였다. 그 때만이라도 병원에 갔으면 쉽게 고칠 수 있던 병을 완전히 키우게 됐다.
아픈 징조를 포착했는데 자식이 무심코 지나친 셈이 됐다. 그래서 정말 모친께 할 말이 없다. 오직 용서를 빌고 쾌유를 빌 수밖에 없다. 빨리 병원에서 나와 함께 지냈으면 하는 바람뿐이 없다. 모친 방과 1미터 떨어진 화장실이라도 걷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모셔오고 싶다. 현재 발에 힘이 없어(특히 왼쪽 팔과 왼쪽 다리) 일어설 수가 없다. 가끔 휠체어에 의지해 병원 안을 돌 정도이다.
담당 주치의는 나이가 노쇠해 걸으려고 하다 쓰러지면 고관절 등이 부러질 위험이 있고 영원히 누어 지낼지 모른다면서 그냥 휠체어를 이용해 사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다. 모친이 평소 건강한 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어나 아무 탈 없이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병원 생활과 직장 생활을 병용해 하다 보니 나도 감기와 폐렴으로 병원을 찾는 신세가 됐다. 내가 평소 소통하고 의지했던 산소 같은 지인도 떠나버렸다. 내가 좋아한 직장 후배는 갑상선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고 있고, 직장 선배 한분은 뇌출혈로 고생을 하고 있다. 이제 모친까지 병석에 누워 있으니, 마음이 울적하고 착잡할 뿐이다.
▲ 지난 2010년 7우러 조카 면회를 갔을 때 모친의 모습이다. © 김철관 | |
내가 아파 잠시 병원에 가지 않은 동안 큰형님과 여동생, 동서가 모친을 24시간 교대 간병을 했다. 정말 이들에게 미안해 할 말이 없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도와주지 못했지만 죄송스러울 뿐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완쾌되면 모친의 간병을 도맡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요즘 병원을 들리지 않으니 모친이 나를 자주 찾는다고 형님에게 메시지가 온다. 제 몸이 고달프니 갈 수 없는 신세라는 것을 모친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님,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빨리 컨디션을 찾아 모친을 편히 간병해 드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