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우리나라 최초로 배재학당(감리교)에서 새로운 서양음악을 가르친 교사가 바로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이다.”
12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배재학당역사박물관 3층 세미나실에서 ‘배재학당 125주년과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개관 2주년’을 기념해 특별 강연을 한 강선미(여성학 박사) 하랑성평등교육연구소장이 강조한 말이다.
이날 ‘매티 윌콕스 노블과 배재’란 주제로 강연을 한 강 소장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진정한 여성성’으로서 우리나라 여성선교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 1872~1956) 여사라고 피력했다.
강 소장은 당시의 진정한 여성의 미덕을 ▲경건(남성보다 종교적이고 영적임) ▲순결(몸과 마음, 정신의 정결함) ▲순종(남성이 모든 행동을 지시하고 결정하는 ‘영원한 아이’) ▲가정성(산업혁명에 의해 일터와 가정의 분리 : 가정은 주부의 영역) 등으로 요약했다.
그는 “19세기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으로 보지 않고, 여성적인 천성의 자연스러운 표출로 봤다”면서 “19세기 말에 등장한 가정경제학도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가정에서의 책임을 맡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강 소장은 “이제 이런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낡은 구습에 불과하다”면서 “당시(19세기의 개화기 초) 힘 있고 개혁적인 여성으로서의 현모양처였지만, 아직도 그 시대(19세기)의 ‘현모양처’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서 “이제는 ‘진정한 여성성’보다 개성존중, 인격체, 서로 간의 진정한 파트너십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모양처, 진정한 여성성 등은 현재 남성들에게 영원한 로망으로 보일지 모른다”면서 “100년 전 식민지시대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절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특히 “당시는 영혼을 바탕에 두고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것으로 인식했다”면서 “유엔 ‘인권선언’에도 나오듯이 현재는 ‘법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제 남성과 여성들이 차별 없이 사회적․문화적으로 평등한 것이 중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강 소장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1892~1934)까지 42년 동안, 서울과 평양에서 생활하면서 노블 여사가 기록한 <노블일지>(2010년 2월, 이마고 출판)를 번역한 장본인이다.
강연에서 그는 노블 여사가 쓴 <노블일지>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했다.
“1892년 갓 결혼한 남편과 함께 감리교 선교사 신분으로 조선에 정착해 42년간 생활상을 기록한 일지이다. 특히 동학혁명,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병합,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한국근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가공하지 않고 생생하게 증언해 놓은 책이다. 일제 수탈과 폭력, 당시 외국인 눈에 비친 우리의 생활상,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의 열악한 삶 등이 기록돼 있다.”
▲ 강연 중인 강선미 하랑성평등교육연구소장 © 김철관 | |
특히 3.1운동에 관련한 기록들이 많은 분량을 통해 상세히 기록돼 역사적 사료가치가 많은 책이라고도 했다.
그는 노블과 배재학당과의 인연을 ▲배재학당에서 예배와 음악수업 ▲배재학생들의 어머니 전도 ▲배재학생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깊은 동정과 염려 등으로 압축했다.
강 소장은 “1893년 1월 21일 노블이 보고 기록한 배재학생 수업의 첫 인상이 아주 흥미롭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모두 교실바닥에 앉아 책을 펴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박자에 맞춰,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분홍색 저고리와 커다란 리본으로 발목을 묶는 흰색 바지를 입었다. 양말도 흰색이었고 나무로 만든 나막신은 문간에 벗어 놓았다. 그들 중 몇몇은 옷이 아주 더러웠다. 교사는 한 학생에게 배운 것을 반복하라고 시켰고 나머지 학생들은 공부를 멈추고 앉아 있었다.”
이어 그는 “1919년 5월 배재학생으로 민족독립운동을 했던 김귀순 선생에 대한 노블의 회고도 눈여겨 볼만하다”면서 “당시 일본의 잔인성이 그대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배재학생 김귀순이 두 달 만에 석방됐다. 그가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기 전 2주 동안, 그는 종로경찰서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밤낮으로 매일 네 번씩 다른 사람들과 꿇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 긴 널빤지를 끼고 앉아 손은 한데 묶여 머리 위쪽으로 들려져 무엇인가에 매달린 채로 등에 매를 맞았다. 그는 피가 바지를 흠뻑 적실만큼 맞았다.”
강연을 주최한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김종헌 관장(배재대 건축학부 교수)은 “배재학당이 우리나라의 서양음악의 원천이었다”면서 “노블 여사의 음악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한편, 메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1892년 남편 윌리엄 아서 노블(한국명 : 노보을<魯普乙>) 선교사와 함께 내한했다. 딸 둘과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는 아기 때 병사해 평양에 묻혔고, 큰 딸 로츠 노블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이며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G, 아펜젤러(1858~1902)의 장남 헨리 다지와 결혼해 한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을 이어갔다.
1889년 11월 6일 서울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출생한 헨리 다지 아펜젤러(1889~1953)는 1952년 11월 배재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중 건강이 악화돼 귀국해 53년 12월 1일 64세 나이로 별세했다. 그가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가 54년 10월 18일 한국으로 와 양화진 묘역에 안장됐다.
이날 강연을 한 강선미 하랑성평등교육소장은 이화영대 영어영문학과와 동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석사학위,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한 국제연합아동기금 대외협력부 홍보관, 2005년 세계여성학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장, 경기도가족여성개발원 교육훈련실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기독교사회발전협회 간사, 숭실대 기독교사회연구소 연구원이다.
그는 국제협력에서의 성평등 정책을 비롯해 다양한 성평등 정책 연구와 교육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의 근대 초기 페미니즘 연구> <가족철학 : 남성철학과 여성경험의 만남> <한국사화운동의 과제와 전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