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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신화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서 반여성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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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모라
기사입력 2007-10-14

나는 십여 년 전 ‘여성학에서의 주체성과 객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에너지 법칙’과  ‘두뇌 프로그램 카피 가설’ 그리고 ‘조화주의’를  설명했다. 그 중 조화주의 사상의 일부는 ‘공자를 울린 여자’에 수록되어 있다.  
 
내가 당시 설명했던 ‘두뇌 프로그램 카피설’은  라캉의 ‘주체’ 개념과 일부 겹친다.  다소간의 교집합이 있을 뿐이지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니다.   라캉의 마음 통찰력과  나의 ‘두뇌 카피설’은  시공을 초월해  일부 함께 한다.   (인간의  경험상 보편적으로 통할 수밖에 없다고 봄.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 
 
내가 통신에서 ‘두뇌 프로그램설’로 여성학을 설명할  때 여성학 공부하던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좀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인간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틀로서 내가 만든  가설들은 한양대 법대 시절 고시반에서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진행하였다. 학부를 법학과로 입학해서 대학원을 ‘산업대학원 화공과’로 전향 선택한 후 중도하차한 까닭도  내가 법학 공부를 하지 않고 심리학 연구를 과학적 측면에서 계속했던 이러저러한 사연과 연관이 좀 있다.   
 
여성주의자들이 라캉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라캉의 심각한 오류(치명적인 오류)를  짚어볼까 한다.  
 
라캉의 세 가지 개념 -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 -  이 중에서   라캉이 언급하는 ‘실재’는 라캉 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진 특수한 개인들을 위한 순수 단어이다.   창작 예술품인 셈이다.     이런 학문적 작업은  사회적 개념을 개인전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파괴시킨   치명적인 오류 중 하나이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본다. 
 
자연 언어를 포함하여  기호를 포함한  모든   언어는  원래  인간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회적으로 약속한 것이다. 마치 0, 1, 2, 3...이라는 숫자들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약속했듯이. 비트겐쉬타인의 언어의 정확성 철학을  염두에 두더라도  언어가  사회적 약속인 것은 변함이 없다. 1은 어느 사회에서나  똑같은 개념인 1이다.  
 
실재(real)라는 개념은  동서양 막론하고 - 사상적으로 사회문화의 차이에 따라  약간씩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해도 -  공통적인  관념으로   통하는  약속이 있기에  가능하다. 내가 도덕경을 설명할 때 실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라캉의 실재계와 같은 목적을 두고 결과적으로  유사하거나 동일한 상념을 상징한다.      
 
‘실재’는 언어로  설명하기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신정모라  ‘에너지 법칙’을 차용하여 설명해 본다. ‘실재’의 개념은 인간  마음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제로가 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마음 에너지 0을 배경으로 한다. ‘신에의 헌신’‘자아의 완전한 소멸’‘욕망 제로’ 등등으로 표현되며   완전한 마음의 평화라는  정신적 배경 하에  드러나는 세계가 ‘실재’이다. 이것은 이미 시공을 초월해 인간 사회에서 약속된 사회적 관념으로서의 ‘실재’이다.  
 
즉 인간의 몸의 특징에 따라  실재는 체험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체험되지 않는다고 실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개념 자체가 약속이기 때문에. 라캉이나 지젝 같은 상징계에 에너지를  과다 소모하는 특이체질의 사람들이 ‘실재’를 체험하기 위해  상징계에서 언어(마음)라는  칼로  무작정  문을 두드려 마음을 진창 부셔놓은 후  에너지가 고갈되자  나도 에너지 0상태의 마음 뒤에 숨겨져 있던 실재를 보았도다.  그랬더니 에너지 제로 상태의 실재는 마음의 평화가 아닌 섬뜩한 파괴 후의 날것 그 자체였도다. 이런 어리석음을 행한  것이다.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과 에너지 고갈은 엄연히 관념상  출발부터 다르다.   발달된 기술로 만들어  에너지를 최소로 적게 소모하는 냉장고와  에너지를 과다 소모해서 퓨즈가 나간 상태의 냉장고는 다르다.  전자는  ‘실재’의 사회적 개념에 접근하지만 후자는 라캉의 ‘창조된 실재계’를 비유한다.
 
숫자 0이 엄연히  인간 사회의 약속으로 존재하듯이.  실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에너지 0.000000000000000000......1   이 정도의 소량을 마음에 소모하는 현상은 가능하므로  에너지 0에 가깝게 소모되는 마음이 있다는 가정 하에  드러나는 실재가  관념상 가능하고 실제로 존재한다. 인간의 눈빛은 이런 이론을  증명해 준다. 마음에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 사람의 눈!  평화로움!  깨달음!  뇌파!   인류가 암묵적 약속으로 이런 경지를 증거로 해서  마음 제로를 가정하는 개념을 통용해왔다. 마음 에너지 제로 상태(침묵)가 짧은 순간이라 해도 그 상태의 자연, 대상을 실재로 개념지우는 사회적 약속이 엄연히 존재해 왔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약속이 왜 중요한가? 그건 마음 에너지 제로라는 상태는 인간 생명력 연장과 과학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면 오래 산다. 마음이 평화로운 수행자는 수명이 길다. 생각이 적은 사람이 평화롭다. 대중은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등등. 수없이 많은 예들이 즐비하다.
 
(인간이 마음을 사용할 때는 어떤 경우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생명 작용에는 에너지 소모와 결부된  자연법칙이 따르므로. 정신분석학에서 설명하는 마음의 작용에도 이런 식으로 신정모라  에너지 법칙의 관점에서  간단히 설명하는 과학적 차원이  있다. 그것이 조화주의  관점에서의  바라보기이다. )
 
라캉은 언어는 새로운 폭력이자 창조라고 하면서 사회적 약속인  ‘실재’라는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운 라캉만의 ‘실재계’를 정립했다. (사실 분석해 들어가면 라캉 개념의  배후는 이데올로기적이다.)  진실을 왜곡해서 혁명을 꿈꾸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 맑시즘이  인간 특징을 고려하지 않은 이론으로  진실을 왜곡했지만 그 의도만은 선의였듯이 라캉의 의도 역시  선의로 느껴지지만 ‘실재’에 대한  진실 왜곡은 라캉의 선의를 학문적 사기행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라캉의 ‘실재계’는 에너지 법칙으로 설명하면 마음의 평화는커녕  마음의 전쟁이 남긴 처참한 마음의 질식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인간 사회가  약속한  실재 개념과는 다른 차원으로 변질된 것이다.  
 
더 나쁜 것은  라캉의 실재는 초월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라캉의 상징계)가  창조한  예술 작품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은 실재가 상징계에  붙어있다고 한다.  
 
라캉은 상징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순전히 마음 노동으로 새로운 두뇌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뿐이다. 정신분석학이라는 천으로 새로이 만든 언어의  패션! 수행이나 훈련으로 체득 가능한 인간 신체적 특징이 결정짓는 ‘실재’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라캉의 두뇌 프로그램은  지젝에 의해  확대 혹은 축소 복사되고  한국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복사되었다.   복사기는 언어였으므로 이들은  자신의 두뇌에서 상징계(언어)를 과다 작동시켜 마음 에너지를 고갈시킬 때까지  말장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지젝이 왕성하게 말장난을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지젝의 몸에서  마음 에너지를 중단시켜 ‘실재계’를 바라보게 하는 방법은 없다. 지젝의 마음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면 광기로 접어들 것이고 광기는 병으로 이어지고 병은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젝은 살아생전에 ‘실재계’를 체험할 기회가 전혀 없을 것이다. 소위  천재들이 밟아 나가는 전형적인 행보이다. 
 
여성주의자들이 학문하는 방식은 이런 경지와 차원이 다르다. 에너지를 고려하는 마음 사용 방법으로 생명력을 전파시키면서 학문하기 때문에 사회 변혁을 추구하면서도 진실에 보다 여유 있게 접근하고 있다. 
 
라캉의 학문이  초월을 퍼포먼스하면서도 초월에는 접근도 못하고 언어 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라는 증거는  분명해서  라캉을  온통 샅샅이 분석할 필요조차 못 느낀다. (상징계와 상상계는 건드릴 필요성도 없다.  실재계만 설명하는  것으로 라캉은 한 방에 쓰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난해한 언어학은 새로운 ‘마음학’으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사실 마음의 복잡성은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언어가 마음을 흉내 내는 것조차 역부족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전화통화로 안되고 만나서 얘기하자 이런 방법들을 쓴다. 사람의 눈빛과 표정을 보아야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가지고 어림도 없다.  상대방  말은 신뢰하지 않지만  표정과 뇌파와 분위기는 믿는 인간의 특징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라캉의 난해한 언어학은 마음의 진실을 고대로 언어로 형상화하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어쩌면 진실함을 향한 발악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라캉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진실함을 향한 발악’ 때문일 것이다.  
 
라캉과 지젝은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고 실재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학문 영역에서도 인정받기 어렵다. 사회적 언어 ‘실재’라는 단어를 파괴하고 개인적인 창작품으로 변질시킨 대가로 학문 영역에서 축출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예언자로서 활동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주목할 가치는 적어 보인다.     
 
여성들은 지금까지 성실하게 해 왔던 것처럼 페미니즘 관점에서 정신분석학 연구 방향으로  계속해서 개별 여성의 사례들을 드러내야 한다. 거북이처럼. 소수의 천재들이 사실상은 언어 패션 디자인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연 것처럼  행세하며 몇 가지 공자적인 마음 통찰력으로 진보주의자들을 현혹하는 현상에 휩쓸리는 것은 인생 낭비이다. (여성주의 적은 시공간을 초월해  사방에 도사리고 있으니 낭비되는 에너지를 최소화해야 함)
 
21세기에 접어들어서까지  한국에서 프로이트나 공자의 오류를  인지시키기도 힘겨운 마당에 라캉, 지젝 같은 부류에서 생성되는 파괴적 언어 배경 속의 또 다른 반여성 개념들이  나타나 여성주의를 더욱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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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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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07/10/16 [21:46]
라캉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거나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글이군요.. 물론 라캉의 이론이 페미니즘과 전선을 형성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 부분을 차지하고서라도 이 글을 라캉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뭔가 문제가 잡혀야 단선적으로 이야기가 가능할텐데 대체 이런 이야기가 왜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라캉에게 실재계는 사회적 악속의 세계인 상징계의 가능 원인이자 틈새입니다. 인간에게 욕망이 있는 이유는 결핍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 결핍은 주체또는 타자의 공백이자 틈새입니다. 이 틈새를 똑바로 보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은 환상이지요. 이 대상, 욕망을 가능하게 하며 그 틈새이기도한 결핍이 바로 대상a고 실재입니다.

행자 07/10/18 [12:08]
신정모라님은 좋은 텍스트가 될 것 같군요.
모라님의 럭비공 독법과 창조적 오독은 흥미롭지만, 
이는 문제제기나 발상단계에 국한될 때 의미가 있겠지요. 시작은 럭비공이었더라도 
전개와 마무리는 추적 가능한 행로가 드러나는 둥근 공이어야 독자를 고려(배려)한 글쓰기이며 공부하는 이의 자세이겠지요.  
흥미롭게 읽었지만, 읽으면서 라캉을 이렇게 어이없게 읽을 수도 있구나 생각도 해봤지만, 솔직히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님의 무엇이 라캉을 비롯한 대상의 실재(혹은 실체)를 바라보는데 있어, 그토록 장애가 되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선입견인지  아니면 어떤 견고하게 자리잡은 교조인지,  그냥 인지부조화인지...
좀 안타깝습니다. 님의 엄청난 마음에너지가 온전하게 온화하게 실재를 향할 수 있기를 빕니다. 
신정모라 07/10/22 [10:16]
최종렬 저서 '타자들'에서 발췌합니다.  119쪽

.............데리다의  '팰러스 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라는 용어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대립적 구조 남성과 여성(비남성)의 분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남성과 여성(비남성)이라는 이원론은 온갖 종류의 이원적 대립의 원형이다.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이원론이 시각의  특권화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보이는 것은 현전하는 것이고, 안 보이는 것은 부재한 것이다.  자지는 현전의 상징이다. 왜? 그것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고스 중심주의는 그 논리를 시각 중심주의로부터 끌어오는 팰러스 중심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생략...  

이리가레이에게 있어 정신분석학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우선 정신분석학은  소년의 입장에서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표상하는 남성 담론의 모델이다.   [신정모라의 '정신분석학은 남성학이다'라는 글이 인테넷에 있으니 참조 바람]  또한 정신분석학은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모델이다.    정신분석학 담론은 다른 담론들이 말하지 않고 남겨 놓은, 여성에  대한 많은 가정과 믿음을 분명히 언명한다.  또한 그것을 읽고 쓰는 전략을 제공한다.  왜냐면  정신분석학은  누가 말하고, 쓰고, 그리고 읽는지를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이리가레이에 따르면 읽고 쓰는 전략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 언어학자나 심리학자처럼 발화(문장의 주체)에 작업하기보다는  발화 행위(말하는 주체의 장소)에 직접 작업을 해야 한다.  그녀는 발화를 가정하는 주체의 진정한 정체성을 가려내기 위하여 말하는 주체의 발화 행위를 분석하고자 시도하고,  남성의 타자로서 남성의 상상적인  것에 단순히 통합되지 않는 여성 주체를 위한 조건을  이론화한다.    방브니스트에 따라 이리가레이는  나와 너는 발화 행위에 속하고 메타 언어는 발화에 속한다고 정의한다.   메타 언어는 남성 언어로서  남성 'I'가 제삼의 인물(삼인칭) 또는 중립적인 자리로 가정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의 발화 행위 자리를 점유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리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메타 언어는  그릇된 환상이다.     그 누구도  발화행위 자리와 발화의 자리를 동시에  점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성의 메타 언어는  담론의  중립성이나  과학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단지  남성이  표상 형식일 뿐으로  이 속에서는 여성이 결코  표상되어질 수 없다.      이리가레이의 목적은   서구 철학에  만연되어 온   남성  'I'의   가장된 메타 언어를 발가벗기는 것이다.  

-------생략......
서구의 모든 담론과  문화는  시각화의 구조를 보여 주는데,  이 속에서는 남성이 자신의 에고를  세계에 투사한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남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볼 때마다 그 자신의 반영물을 보게끔  만드는 거울이 된다.   몸/물질로서의 여성은  거울을 만드는 재료인 바,  결코 반영될 수 없는 거울의 일부분,  예컨데 거울 뒤에 입힌 박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결코 그 자신의 반영물을 보지 못한다. ....생략 

사족: 
신정모라  이론은  이리가레이처럼  담론을 사용하여  남성학으로서 정신분석학을 비판했던 <정신분석학은 남성학이다> 도 있지만,  에너지 법칙과 같은 자연 과학의 측면에서  물질적 차원의  접근 방법도 사용하고 있다.   신정모라  이론에 따르면 '라캉은  프로이트보다  더 교묘하게  여성을 소외시켰다'    여성들이   남성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에 구역질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솔직히 공감하는 바가  좀 있어야 되는데 성에 대한 언급에서 정신분석학은 절망적이다)   라캉과 지젝은 여성을 더 복잡한 언어로  왜곡시키면서   그 왜곡으로 인한 고통 소리는 아예 들을 능력조차 없다.  남성 언어에 빠져 에너지를  소진해  파김치가 된 현대  진보 남성의 비극이다.      
신정모라 07/10/22 [10:22]
정신분석학은 남성학이다 라는  꼭지는   신정모라 저서  '공자를 울린 여자'  230쪽에도 있습니다.     이 꼭지는   다른 여성학자의  글을 참조하여 쓴 것은 아니고  필자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 결과입니다.  

필자의  라캉 비판글은  라캉에 대한 저서를  참고하고 분석하면서   자신의  인지과학적  정신분석과  결합시킨 데서  생산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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