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은 정당하지 않다고 믿는 전쟁에 반대하면서 비방과 투옥을 겪었다. 또 그는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희롱, 경멸, 불명예, 독설, 왜곡, 억압을 참아내야 했다고 촘스키는 언급하였다. 촘스키 역시 행동하는 지성으로 강대국의 횡포를 중단 없이 고발함으로써 역경을 겪었다.
한줌도 안 되는 북한 핵에 초점을 맞추는 것부터 잘못되었다. 한반도 평화 문제는 원천적으로 한반도 주변 강대국이 가진 막강한 핵무기에 의해 좌우된다. 미국의 지식인들과 한국의 지식인들 남한의 민초들까지 우리 모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강대국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진리라는 듯이 한반도 땅의 상층부 사대주의자들은 ‘한반도 비핵화’를 합창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투쟁인 한국 여성이 무슨 에너지로 진실을 탐구하고 그것을 발언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암묵적인 진실 은폐가 대중에게 허위의식을 심어 주었고 여성주의는 비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약소국 학대 정신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그것이 여성주의 정신의 순수함이다.
인류 마지막 식민지 노예 처지를 감수해야만 돌아버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한국 여성이다. 여성이 미국과 한국 상층권력의 야합으로 의심 없이 진실처럼 보이는 ‘한반도 비핵화’는 사기극이라고 비난한다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일까?
사실 계란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여성이 발설하는 진실은 러셀이나 촘스키가 감수했던 온갖 고난은 기본이고, 거기에 더하여 여성의 발언 자체가 증발해서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
그래도 여성의 투쟁은 계속된다. 정상회담 때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눈물 흘리는 민족주의 종교 여신도들 눈에서 그것을 읽었다. 남한 민초들 처지도 다르지 않다.
한국의 언론인, 정치인, 지식인들은 시공을 초월해 초감각 센스로 통하고 있다는 듯이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한반도 비핵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한국 지부당이라고 할 만한 한나라당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한나라당은 우리나라 정당이 아니라 미국 국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니까. 자기 주인 나라 이익을 위해 주인과 같은 입장이라는데 할 말 없다.
사실 한국인이 미국인과 같은 입장일 수는 없지 않겠나!
햇볕 정책의 주인공 김대중 전 대통령과 포용 정책의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하여 진보정당의 평등파들까지 ‘한반도 비핵화가 평화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강대국의 비핵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합리성은 보여 주지 않는다.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 사고를 추구한다는 평등파들은 생각하는 것을 중단한 이상한 합리주의이다. 이들이 북한 비핵화의 선결 조건으로 강대국 비핵화를 문제 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강대국의 핵무기는 고대로 허용하고 오로지 약소국인 북한만 비핵화해서 미국의 침략이 가능하게 해야만 한반도가 평화롭다는 식의 앞뒤 안 맞는 주장만 반복하며 김정일 독재 비판에 초점을 맞춘다.
북한 종교 정치는 미국의 침략 앞에서 일상적인 불안증에 시달린 인민들이 자기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창시했고 그 교주로 김일성과 김정일이 존재하는 것이다.
역지사지이다. 만약 남한이 러시아로부터 일상적인 침략 불안증을 겪어 왔다면 남한에도 민족주의 종교 정치가 탄생하였을 것이고 교주가 영웅시 되었을 것이다.
독재라는 것은 평시 상황에서 비판받는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인민들의 필요성에 의해 창안된 전시 체제이므로 독재로 비판하는 것 자체가 진실 왜곡이다.
종교 정치에는 인권유린이 따르게 마련이다. 종교 정치 상황이 만들어진 책임은 강대국의 약소국 지배 욕구에 원인이 있으므로 북한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도 미국이 책임져야 마땅한데도 비판의 화살을 미국에게 돌리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북한을 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진보주의자라고 한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 이런 불합리한 사고로 자기 두뇌를 학대하는 증상을 앓고 있다. 미국의 애국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가 같은 뜻인 줄 안다. 노자의 도덕경 제1장은 언어의 이런 특징을 비유한다.
미국의 애국주의는 보수이다. 한국에서는 반대이다. 민족주의가 진보이다. 한국이란 약소국은 남북한으로 갈려 강대국들의 침략에 희생당했던 피해자 처지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의 수단으로 선택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진보일 수밖에 없다.
해외 유학파 지식인들은 가해자 미국과 피해자 한국을 동일한 상황으로 인식하여 한국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가 파쇼라고 비판한다. 평등파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서양 교과서대로 단어의 뜻을 동일 개념으로 인식하여 김정일은 무조건 죽여야 하는 독재자로 인식한다. (반대로 월드컵에서의 빨간 물결은 성범죄를 유발하는 파쇼인데도 평등파는 비판하지 않았다. 여성주의만 한국의 파쇼 현상을 올바로 판단한다.)
진보 정당 내에서 권영길을 보수라고 비난하는 평등파들의 생각 없음은 곧 양심 없음이다. 권영길은 진정한 진보이고 한반도의 유일한 양심 정당을 대표하며 여성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평등파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단합하여 진정한 진보의 상징 권영길을 지지해야 한다.
진정한 진보의 상징 권영길이 남한의 애국주의와 북한의 민족주의와 통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므로 국립묘지에 참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는 미국의 무정부주의자들처럼 양심 세력이 아니다. 강대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강대국의 침략에 반대하여 아나키스트가 된다.
한국은 그 정반대 상황이다. 강대국의 침략에 반대하여 애국자가 되어야 양심있는 지성인이다.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사실은 사대주의 정당 이명박 세력에 힘을 보태주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이상할 것이 없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파쇼라고 비난하면서 자기들이 무정부주의자이고 자유주의 진보라고 의심 없이 믿고 있는 평등파 지식인들을 볼 때마다 여성은 첩첩산중을 느낀다.
이러한 북한에 대한 이해는 부르스 커밍스의 ‘North Korea:Another Country -김정일 코드’라는 책 배경에 깔려 있다. 외국인도 북한의 종교 정치를 이해하고 있다. 심지어 같은 민족인 한국인이 몰이해로 서로를 경멸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이다.
한반도 진보 세력인 민족주의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은 진보 중에서도 끝자락에 위치한다. 미래에 북한이 핵인정국가가 된 이후에도 한반도 여성들은 그 때까지도 거북이처럼 질기게 살아남아 여성을 학대할 것이 분명한 유교 문화와 투쟁해야 한다.
그러니 너도나도 남북 정상 회담에서 비핵화라는 사기극보다는 보다 솔직하게 핵인정국가로 빨리 진전해야 한다고 투덜대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한반도 비핵화가 미국을 위한 사기극이라는 것을 미국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한국 남성들에게 그렇게 천사 같은 얼굴을 보인 박노자는 한국 여성들에게는 큰 죄를 지었다. “한국의 문제는 유교 문화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대 문화 때문”이라고 진실을 은폐한 대가로 유교주의가 굳건한 사회에서 지성인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유교 파워가 아직도 막강하기 때문에 유교에 편승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고 매장 당한다. 박노자는 스스로 한국이 그런 문화임을 증명해 주었다. 이번 남북 정상 회담 장면을 목격하고도 박노자가 유교에 대해 같은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여성주의를 포함하지 않은 사상은 불안전하다. 진보진영의 평등파와 박노자가 친절하게도 그 증거를 제시했다고 본다.
‘죽이고 싶은 여자가 돼라’의 저자 필리스 체슬러 박사는 착한 여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악이 승리한다고 했다.
언론인들은 철저히 진실을 은폐한다. 임수경 씨가 북한에서 돌아오면서 수갑 차고 오는 장면과 노무현 대통령의 카메라 플래쉬 받는 장면을 비교하며 격세지감이라고들 했다.
그건 격세지감이 아니다. 미국의 침략 야욕에 공포에 떨었던 인민을 대표하는 한반도 여성의 고난! 그가 임수경이다. 강대국의 한국 지부장으로서 누리는 남한 권력의 호강! 그것이 남북 정상 회담 때의 카메라 플래시였다.
진실은 아프다. 남한에서 사실 약소국의 민중과 인민의 삶을 대변하는 세력은 민노당 자주파와 사회당뿐이다. 진보 세력은 민노당 권영길을 중심으로 뭉쳐 대선을 승리하고 북한 국민을 구해야 한다. 여성주의 보살핌은 약자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