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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의 미인대회 참가 유감’에 더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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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태
기사입력 2006-08-02


이화여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변지원이 <한겨레> 8월 2일치에 기고한 '아나운서의 미인대회 참가 유감'은 반론의 여지가 많을 것을 예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고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엄호사격용 이상의 진전을 보여주지 못해서 유감이다.

변지원은 칼럼지면의 대부분을 아나운서가 모국어의 '정(正)의 세계'를 담당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민족·국가주의에 대한 무의식적 순종이라고 판단하면 지나친 과단일까.

변지원은 한글의 우수성과 이 한글의 '정의 세계'를 강조하다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우리가 한국의 아나운서에게 만약 남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변지원은 아나운서가 미인대회에 참가한 것에 대해서 못마땅한데 딱히 반박논리의 근거를 못 찾다가 언어의 민족성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정'의 세계를 수호해야 할 인물이 굳이 '속'의 세계로 뛰어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변지원이 말하는 "우리"는 누구들을 일컫는가. 모국어를 수호해야 할 아나운서가 미인대회라는 속의 대회에 참가해서 불안하다는 말인 듯한데, 이는 언어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페미니즘 측면에서 미인대회의 이데올로기적 기구의 역할에 여성이 종속되는 게 불안한 것 아닌가.

기자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페미니즘 시각에서의 문제제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합리화해주는 논리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빈약한 논리는 문제의식조차도 희석시킨다. 더구나 그 빈약한 논리에 민족·국가주의적 논리의 더함은 설득의 뺄셈이 될 뿐이다.

▲ 변지원 연구원은 '아나운서의 미인대회 참가 유감'이라는 글을 한겨레신문에 기고했다.     © 한겨레신문 8월 2일자 pdf

변지원의 논리대로라면 아나운서가 미인대회가 아니라 안티미스코리아 대회에 참가하는 것조차도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의 세계를 수호해야 할 인물이 굳이 '속'의 세계로 뛰어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지는 것이다"고 말이다. 

언어학의 범주로 가면 이번 논쟁의 범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우려가 있지만 변지원이 모국어의 우월성을 근거로 칼럼의 전반을 다루고 있어서 언어철학적 입장에서 몇 마디 지적하자면 태초에 하나의 언어인 '아담의 언어'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혼미해진 오늘날에 각국의 '바벨의 언어'를 더욱 혼합시켜야 '아담의 언어'에 도달하는 역설에 동의한다면 변미정이 영역으로 가르려고 했던 언어에 있어서의 '정의 세계'와 '속의 세계' 또한 구분이 모호해진다.

최근 인기 있는 아나운서인 노현정의 '속의 세계'인 오락프로그램 진행은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는 아나운서의 모습이었다. 정과 속의 가름도 불필요하지만 굳이 정과 속이 존재한다면 이들 정과 속은 더욱 섞여질 필요가 있다.

변지원은 다음과 같이 칼럼의 마무리를 짓는다.

"우리글을 제대로 소리내어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으로서 욕심을 좀 부리고자 한다면, 이것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대 역행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기자가 보기에는 아쉽게도 변지원은 이번 칼럼에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대 역행적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아나운서가 미인대회를 참가한다고 해서 모국어 실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과다추론의 오류, 페미니즘의 시선에 민족·국가주의의 접합시도 오류.

기자는 이번 미인대회 논란이 오버해서 부풀려진 점은 아쉽지만 아나운서가 모국어를 수호해야할 애국지사로 둔갑시키면서까지 아나운서에 대한 엄숙주의 풍토를 보존하고 싶지 않다.

지난 4월 28일자 영국의 <가디언>지에는 올해까지 27년 간 BBC에서 뉴스 진행을 해왔던 62세의 안나 포드가 은퇴한다는 소식을 1면 기사로 그녀의 주름진 얼굴과 함께 실었다. 이 기사가 너무 인상 깊어서 따로 오려서 스크랩을 했었는데 이 기사에서 이번 미인대회 논란의 초점을 잡을 수 있겠다.

여전히 엄숙주의로 굳어져 있는 아나운서의 이상적 황금비인 '40대 중년 남성과 20대의 젊은 여성'의 절묘한 배치를 깨뜨리는 데 노력하는 방향이다. 현재 인기 있는 아나운서인 노현정, 최윤영 등이 그녀들의 표면적 미(美)가 사라지더라도 수십 년 후에 한국의 안나 포드로써 은퇴하는 기사를 접할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표면적 미에 대한 자본주의적 논리의 침투에 대한 페미니즘 비판은 받아들이지만 '표면적 미' 자체에 대한 긍정을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은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기자가 이러한 지적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얼마 전 모바일 화보집을 낸 아나운서 임성민과 그간 페미니즘 진영으로부터 과도한 비판을 받아온 마광수의 엄호차원이다. 무엇보다 이번 미인대회 논란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그녀가 본업으로 무사히 복귀하여 활동하길 바란다.

다음은 변지원 연구원의 8월 2일자 한겨레신문 기고문 전문이다.
 



아나운서의 미인대회 참가 유감
 
최근 한 텔레비전 방송사의 여성 아나운서가 미인대회에 참가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이 논쟁의 핵심은 사실 ‘품위-선정성’이라든가 ‘표현의 자유’에 있지 않다. 핵심은 오히려 ‘언어’에 있다.

아나운서들은 이 시대 그 누구도 현실 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현실 생활의 언어 속에는 여러 가지 방언도 섞여 있으며, 규범에서 벗어나는 단어나 발음들도 자유자재로 사용된다. 그래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현실 생활에서 아무리 재미있던 이야기도 글로 옮겨 보면, 어색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현실은 입말의 세계인데, 이것이 글자로 정리되는 글말의 세계로 옮겨지면 그 차이점이 어색할 정도로까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바름(正)-속됨(俗)의 구분이 있는데, 글말의 세계가 ‘정’을 담당한다면, 입말의 세계는 ‘속’을 담당한다. 연설문이라든가 보도문 등은 ‘정’을 담당하는 대표적 보기다. 같은 공중파라 하더라도, 오락 프로그램들은 ‘속’의 세계를 넘나들며 입말 속에 담겨 있는 달콤 쌉쌀함을 찾아 전달하는 데 그 매력이 있다. 그래서 뉴스와 개그는 그 영역도 다르고, 전달 언어 역시 사뭇 다르다. 글말로 되어 있는 연설문이나 보도문 등도 음성 언어로 전달된다. 그렇지만, 입으로 말해진다 하여 이런 문장들이 우리가 평소에 쓰는 어투나 발음으로 전달되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의 세계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는 이처럼 ‘정’의 세계를 맡아서 글말을 전달하는 전문 인력이다. 한국의 아나운서가 전달하는 것은 한국의 언어이며, 이것은 이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제대로 발성될 기회가 없을 한국어 글말의 음운 체계다. 만약 아나운서들이 없다면, 한국어 글말의 음운 체계는 교과서 속에서 죽어 있는 글자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부단한 노력을 요구한다.

아나운서의 기본 조건은 모국어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연습이지, 흔히 착각하듯 빼어난 외모나 멋진 배경이 아닐 것이다. 아나운서가 청취자들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느 나라나 상황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국의 아나운서에게 만약 남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라는 주장도 그 자체로 영 수긍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미인대회가 ‘정’의 세계를 대표하는지, 아니면 ‘속’의 세계를 대표하는지는 누가 보더라도 명약관화하다. 한국어의 ‘정’의 세계를 수호해야 할 인물이 굳이 ‘속’의 세계로 뛰어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강대국들 틈에서 겨우 7000만명의 사용 인구를 갖고 있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 사람으로서(중국어 사용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시라!), 영어 공용어다 중국어 열풍이다 하며 갈팡질팡하도록 만드는 이런 중심 없는 언어 세계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진정한 우리글을 가져본 지 이제 겨우 500년이 좀 지났다. 우리글을 제대로 소리내어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으로서 욕심을 좀 부리고자 한다면, 이것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대 역행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변지원/이화여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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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근영 06/08/02 [20:24]
거창하게 반론할 것도 없이..

결국 한국어를 사랑하므로 아나운서가 미인대회 안나갔으면 좋겠다라는 이상한 결론으로 끝날 뿐더러,

정과 속의 구분에 대한 글쓴이의 주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언어의 '정' 있는 사람은 다른 분야의'속' 에는 절대 가면 안되나?
한분야의 '정'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정'의 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억지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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