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에리세의 영화 《벌집의 정령El Espíritu de la Colmena, 73》은 그 뛰어난 영상들과 영화전반에 걸쳐 배어나오는 슬픈 정서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굳이 프랑코 정권의 역사적 상황들을 불러올 필요조차 없이 군부독재시절의 남한영화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남한의 영화들 역시도 ‘고래’와 같은 그 ‘무엇’을 에둘러 표현해나가다 결국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았던가. 이제 끝인 줄로만 알았던 군부독재가 다시 시작된 80년대의 남한영화들의 대부분은 그야말로 끔찍했었다. 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도의 선택은 결국 80년대 남한영화의 선택과도 같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벌집’은 한편으로는 모호하기도 하지만, 페르난도의 말을 빌려보면 매우 노골적으로 현 사회를 ‘죽음의 휴식조차 허용되지 않는 유리 꿀벌 통 속의 벌들’로 반복해서 고백한다. 그래서 좌절과의 타협에 이은 ‘망각의 협정’은 이 영화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슬픈 분노’의 근원이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 기간동안 죽어간 백만여 명의 사람들과 독재정권을 통해 죽어간 2만 8천여 명의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은 결국 현실이라 불리는 것과의 타협을 통해 망각을 공유한 ‘벌집 속’ 기성세대들에 대한 비판으로 기능하며 이제 다음 세대들인 아나와 이사벨을 통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괴물’ 혹은 ‘정령’에 관한 이야기.
애초에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란 결국 사회적 관계를 위해 부여되는 일종의 식별기호이고, 만들어진 혹은 갓 태어난 피조물에게 부여할 사회적 행위 따위는 없었기에 ‘그’는 영원히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피조물로만 남는다. 하지만 후에 어떤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 그는 결국 창조주이자 ‘아버지’인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신이며, 인간이며, 괴물이 된다. 그는 모든 영역에 속해질 수 있게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감독 빅토르 에리세는 ‘옛날 옛적 이야기’에 1940년의 마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그곳으로 프랑켄슈타인을 끌어들인다.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아나와 이사벨이며 그 중심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야기가 자리 잡는다. 그래서 제임스 웨일의 영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처음 만들어진 직후 사라진 이야기인 괴물이 소녀를 죽이게 되는 장면의 실종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벌집의 정령》은 망각과 타협한 이들의 다음세대를 위한 이야기이고 《프랑켄슈타인 박사》에서 사라진 장면은 괴물이 사실은 ‘괴물’이 아니라 마치 백지와도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도하지 않았던 폭력이 진짜 폭력을 낳게 된 것이다.
아나는 어머니인 테레사에게 정령에 관해 질문한다. “정령은 나쁜 존재인가요? 착한 존재인가요?” 물론 그것에는 선악의 구분 따위는 없다. 대신 무엇을 선택하는가의 조건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때문에 영화는 두 가지의 조건, 아나와 이사벨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사벨이 기성세대를 대변한다면 아나는 그 다음세대에 대한 기대를 대변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괴물의 살해 장면에 대한 아나의 반응은 “왜?”였고 이사벨의 반응은 “영화는 거짓”이며 “괴물은 사실 정령이며 죽지 않는다.”며 아나를 속인다. 이는 부모 자식간의 노골적인 관계묘사와도 같다.
이제 아나와 이사벨은 점점 죽음에 이끌려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죽음의 이미지들 혹은 묘사들에서 이사벨이 실재하는 죽음에서 점점 거짓된 죽음으로 이동해 가는데 반해 아나는 의문만이 가득한 모호한 죽음에서 실재하는 죽음으로 이끌려간다. 그래서 이사벨은 타협과 망각이라는 부모세대의 의식을 이미 흡수한 것으로 그려지고 그 존재는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지워져 나가지만 아나는 실재하는 죽음으로 이끌려 들어가면서 그 존재는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이는 근본적인 질문인 “왜?”로부터 시작된다. 바로 괴물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인 것이다.
|
▲ 영화 <벌집의 정령> 한 장면 © nkino 제공 |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아버지, 도망쳐온 남자, 경찰, 이사벨 그리고 슬픈 괴물로. 그래서 괴물은 이 모든 것이면서 또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것은 지금의 어른들이,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가진 본래의 의미를 폭력적으로 망쳐놓은 것과 같이, 선택해서 던져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의 말미에 아나는 의식의 죽음에 이른다. 실재하는 죽음 쪽으로 점점 다가서던 소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의식의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태어난다. 그때 소녀가 보는 것은 바로 슬픈 괴물이다. 아버지세대의 절망을 끌어않고 아나는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영화 《벌집의 정령》은 너무도 아름답지만 또 너무나 슬픈 영화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역사가 그러했고 우리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아나는 하나의 가이드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목했던 괴물은 사실 우리가 키워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세대에게 그 괴물을 괴물로서 넘겨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을 믿어야 하며 괴물이, 괴물이 아니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괴물은 사실상 우리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 cinematheque.seoul.kr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