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갭슐이란 것이 있다. 언젠가 서울 남산에서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기 위한 타임캡슐 매장행사가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400년이 지나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 우리 후손들은 타임갭슐에 들어있는 것들을 꺼내어 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의 역사와 문화들을 이해할 것이고 어떤 물건을 보면서는 실소를 금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IMAGE1_LEFT}조선일보가 그 타임갭슐에 넣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꼭 조선일보가 들어가 있기를 바란다. 이는 적어도 후세들이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언론의 자유가 있고 언론이 사회의 공기로서 제 역할에 충실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 조선일보를 보며 후손들은 ‘이런 신문지가 발행부수 1위라는 불행한 시절이 있었구나’ 할 것이고 왜 우리가 거대족벌언론과 싸우며 절독운동을 벌여야 했는지를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가끔 자유언론을 외치며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동아의 기자정신을 간절히 염원하는 심정처럼 말이다.
사진 : 설치작가 최병수 작
지난 토요일은 ‘광주민중항쟁’이 22돌을 맞는 날이었다. TV중계를 보면서 이영진 시인(정확히는 모르겠다)인가 하는 분이 헌시(獻詩)를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부끄러움을 안고 다시 가슴에 삽질을 해야 하는 이 역사가 그는 진정 부끄러웠을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를 다 걷어내지 못했고 22살의 청년으로 자란 광주는 아직도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타락한 위정자의 가슴으로는 광주를 보듬을 수 없고 더러운 진물이 흐르는 수구언론의 눈으로는 광주를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다. 영화의 제목이 생각난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긴 영화의 제목이다. ‘나는 조선이 지난 역사에 저지른 일을 알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나는 그 때에 몰랐었다또한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진정 지나간 그 때에는 몰랐었어’ 라고 말하고 싶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나는 슬퍼 미칠 것만 같았다. 이 땅을 주사의 이념으로부터 지켜내고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실현한 저 빛나는 ‘유신’의 지도자를 잃는다는 것은 내게는 곧 절망이었고 금세기에 다시는 만날 것 같지 않은 위대한 지도자를 빼앗긴 처절한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배웠고 혹시 학력고사의 정치경제 시험문제로 나올까봐 나는 유신(維新)의 어원(語源)까지를 암기하기에 바빴다. 긴급조치 위반한 놈들은 죄다 간첩이거나 간첩질을 도운 북괴의 앞잡이였다.
80년 광주의 폭도들은 죽어 마땅한 불순전복세력이었다. 광주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전해주는 친척 형님(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사의 중대장이었다)은 진짜 이 땅을 지키는 국방의 간성(干城)이었다. 내가 배운 교육과 세뇌된 이성으로는 난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들의 젊은 시절은 누구나 그렇게 길들여지며 정신은 박제화 되고 몸만 크는 비정상적 발육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성년이 되기 전에 맞은 광주의 의미가 이처럼 왜곡된 현실에서 어찌 그 이전의 역사에 눈뜰 수 있었겠는가? 그 정신의 혼돈에 방황하며 낭비한 시간과 살육의 도살자들이 집권한 나의 대학시절은 그대로 암울(暗鬱)한 진탕이었다. 그 때 조선이, 동아가 조금만 정직했더라면, 조금만 용기를 가졌더라면 나는 지금처럼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울고 있지는 않을텐데... 하물며 아직도 거짓가면을 쓰고 진실을 농단하는 조선을 보며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독 아니라 절판(絶版)운동이라도 해야 한다. 다시는 몰라서 저지르는 죄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조선은 ‘트로이의 목마’다 친일부터 군사독재를 편들었던 그 과거의 행각은 접어두고라도(사실 너무 많아 일일이 서술할 수도 없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우리의 달력에서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반역사적 반민중적 조선의 죄상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근거없는 주장이라 우길 것을 염려하여 나의 친절함으로 조선의 작태를 조목조목 따지는 수고를 감수하기로 한다. 아! 나는 너무나 조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그들이 꿈을 깨고 다시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이 헛된 꿈을 또 꾸고 있다니? 많은 동지들이 나를 안쓰러워 할 것이다. 미친놈이라고...
5월 15일자
‘[아침논단]트로이의 목마-유석춘’을 보자. 선생질이 심심해서인지 유석춘인가 하는 연세대 교수는 우리의 세상에 ‘트로이의 목마’를 옮겨다 놓고 ‘외부의 요인에 내부가 무너지는 상황을 빗대’어 가정한다.
[관련기사] 여인철, 조선일보의 '트로이 목마' 유석춘, 대자보 84호예컨대 노무현 후보가 내세우는 신민주연합이 영남을 공략하기 위한 호남의 ‘트로이의 목마’일 가능성은 과연 없는가? 또한 노무현 후보가 내세우고 있는 서민층을 대변한다는 복지노선이 결국에는 인기영합으로 치달아 선거 후 우리 경제가 남미와 같은 길로 가게 만드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 가능성은 없는가? 서민을 위한다는 정책이 결국 서민층의 일자리 자체를 박탈하는 결과로 나타날 가능성은 과연 없는가?
선거의 계절은 어쩔 수 없는 의심의 계절이기도 하다.
이 사람의 논리는 노무현의 정계개편이 이 땅을 내부로부터 붕괴를 가져올 ‘트로이의 목마’이고 복지노선은 재정적자를 가져와 경제가 파탄 나는 중남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의뭉스럽게 자신의 안위는 걱정이 되었든지 ‘~없는가?’하는 식의 표현으로 카멜레온 같은 작태를 보인다. 무엇하나 정직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비굴한 지식인에게는 선거만이 아니라 모든 현상들이 ‘의심의 계절’인 것이다. 과학적 명제로서의 의심이 아니라 ‘내 것을 빼앗아 가지 않을까?’하는 피해의식에 중독된 수구꼴통으로서의 의심인 것이다.
나 역시 노무현식 정계개편에 대하여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 없는 비판자이지만 어떻게 ‘신민주연합이 영남을 공략하기 위한 호남의 ‘트로이의 목마’일 수 있는가?’ 이를 뒤집어보면 영남사람들에게 호남당(민주당을 호남당으로 이미 규정해 놓고 있다)을 선택하면 난리가 난다는 전형적인 지역감정의 조장이고 악랄한 지역분열의 기도다. 영남사람이 민주당 찍으면 역사가 절단난다는 이 망언과 독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유석춘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석춘 그리고 이런 글을 칼럼이라고 실으며 망국적인 지역갈등을 조장하는 조선일보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유석춘 그대는 자신 내부로 들어와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그 ‘트로이의 목마’부터 경계하고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하라! 당신이 나와 같은 필부였으면 그나마 용서하거나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머리는 있으나 정신은 없는 상태로 이 땅의 대표적 사학인 연대에서 내일의 동량을 길러내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역사는 불행하다.
또한 조선은 바로 자기 자신이 이 땅의 올바른 역사진전을 훼방 놓는 ‘트로이의 목마’임을 인정하라! 우리들이 조선절독운동을 벌이고 그 행진에 동참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그 ‘트로이의 목마’에 다시는 정복당하지 않으려는 생존권의 싸움이다. 나아가 인간존엄의 가치, 우리 스스로 부여 받은 지고한 인권을 그대들 같은 수구족벌언론으로부터 더 이상 유린당하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이다. 이 글 하나 가지고도 조선의 썩은 잉크냄새를 온종일 풍길 수 있으나 이미 다른 분들이 지적한 바, 나는 참기로 한다.
- 정신병동, 그것은 조선이 차린 정신병동이다. 5월 16일에 김광일이라는 이 무식한 신문지쟁이는 오늘 우리의 사회를 ‘두어 세대쯤 흐른 뒤... 거대한 정신병동을 닮아 있었’다고 할 것이라 가정한다.
‘[트렌드&아젠다]한국은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김광일은 ‘2002년 5월 대한민국’은 ‘광기의 정신병동에 갇혀 있’다고 주장하면서 브라질 출신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문학동네)에서 드러나는 정신병동의 상황을 우리의 현실과 음흉하게 대입하고 있다.
꼭 조선스러운(앞 뒤 내용 다 자르고 필요한 부분만을 차용하여 왜곡하는) 그 방식 그대로 우리 서민들이 사는 이 땅의 현실이 ‘정신병자’들이 우글대고 ‘한 마법사가 나라 안의 우물에 묘약을 푸는 바람에 백성들이 미치고 만’ 광기의 현장이다. 따라서 우리 백성은 ‘오염되지 않은 현자를 몰아내는’ 파렴치한 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이러한 인식이 한 신문의 논설위원이란 작자(作者)가 드러내는 ‘미친’ 정신인 것이다.
여주인공 베로니카는 왜 수면제를 과다복용해야 했을까? 김광일의 표현대로 ‘지리멸렬한 삶을 버리려’ 먹은 것이다. 지리멸렬이란 지루하고 의미없는 일상을 뜻한다. 그렇다면 지루하고 의미없는 삶은 어디서 오는가? 변화없는 일상, 매일 똑같은 그 지긋지긋한 일상을 베로니카는 못 견딘 것이다. 세상이 변화하고 역사가 진보하며 그래서 그 한 가운데 놓인 개인의 삶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일상에서는 수면제를 먹으며 자신을 학대할 필요가 없다. 조선 같이 죽어도 변하지 못할 사물들로 둘러싸인 삶을 그대 같으면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그러니까 베로니카와 같은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옛사랑 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원만한 집안의 주부, 심한 공포증에 걸린 중년의 여자 변호사, 꿈을 잃어버리고 정신분열증에 걸리고만 브라질 대사의 아들... 풍요로운 환경 아래 놓인, 걱정할 것 하나 없이 보이는 이 사람들이 모두 정신병자들이다. 김광일과 그가 있는 곳에서나 만날 법한 피해의식과 우울증 중독환자들인 것이다. 별로 한 것도 없이, 오히려 해꼬지 하면서 가진 것은 넘치는 조선 같은 이들에게 일상의 지루함은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라면 나의 독설일까?
하루하루가 치열한 전쟁터인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정신은 돌아볼 겨를도 없고 정신분열 같은 호사는 가당치도 않다. 김광일은 바로 자신 같은 사람들을 정신병동에 가두어 놓고 자신 스스로 현자인 척 한다. 정신병자의 말을 안 들어주는 의사보다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몰며 가두는 폭력자(수구특권세력)와 그 충실한 검투사 노예(조선 같은 언론)가 문제다. 백번 양보하여 이 땅의 현실이 정신병동 같다 치자. 그 병동은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김광일 그대 같은 염세주의자(세상의 진보가 늘 위협이 되고 불안하기만 한)가 설계하고 조선 같은 족벌자본이 건축비를 댄 것이다. 그래서 그 병동은 유난히 쇠창살이 많고 창문이 작은 것이다. 애초부터 가두어 놓는 것 이외의 기능은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말이다. 그 감옥 같은 철옹성이 이제 내부로부터 또한 외부로부터 무너지며 그동안의 죄상이 밝혀지게 될 내일이 오기 전에 그대는 다시 정신의 감옥을 하나 더 설계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하다. 그대의 부르튼 입술로 주장한 ‘21세기 초 유아기 사이버 공간을 누볐던 죽창’은 사실 ‘가장 정직한 언로이며 가장 날카로운 진검’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억지를 부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파울로 코엘료를 소개한 역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글은 읽었을까? 조선이 하도 짜깁기 신문지라서 그대도 혹 그렇지 않했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감수하는 수고니 정독해주는 예의를 갖춰주기 바란다.
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에뒤아르.
항상 저질러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 포기했던 실수들을 저질러가며 공포가 다시 엄습해올 수도 있겠지만 그걸로는 죽지도 기절하지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기껏해야 날 지치게 하는 게 고작일 공포와 맞서 싸워가며 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현자가 되기 위해 미치광이가 되는 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을 거야, 난 그들에게 모범적인 삶의 교본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모험을 발견하라고, 살라고 충고한거야.
카톨릭 신자에게는 구약성서를
회교도에게는 코란을
유태인에게는 토라를
무신론자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들을 인용하여 줄거야
-<<중 략>>-
따라서 일정횟수에 달하면 더 이상 세포분열을 할 수 없게 되어 점점 늙어가고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대신 유전자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네 후예들은 한없이 다양해지고 점점 진화하게 될 것이다. 자 어떻게 하겠느냐? 고민에 고민을 하던 아담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한다. 사랑을 그리고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으로 한정된 그래서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 <역자 후기 중에서>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에서 멀쩡한 백성들을 정신병자로 모는 김광일과 조선에 요구한다. 공포에 맞서 ‘현자가 되기 위해 미치광이가 되는 법’을 이제부터라도 겸허한 자세로 배우길 바란다. 지금 비록 임종을 맞이할 지라도 당신의 ‘후예들이 한없이 다양해지고 점점 진화하게 되는’ ‘죽음으로 한정된 그래서 가치있는 삶’을 사는 용기를 가지라. 그것만이 그동안 저지른 역사적 죄악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다.
- 불쌍한 조선이여, 네 꼴을 보라 5월 17일자 그 이름값도 못하는 조선일보의 편집인 김대중은
‘[김대중 칼럼]불쌍한 기자여, 네 꼴을 보라’라는 제목의 기명칼럼에서 IPI(세계 언론인 기구) 총회에서 방영된 베네주엘라의 군부독재자 차베스가 자국의 ‘언론을 향해 내뱉은 주문(呪文) 같은 독설’들을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차베스의 그릇된 언론관을 우리들에게 알리려는 친절은 결코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아래에 옮겨 놓은 마지막 내용들이다.
이런 와중에서 여전히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관의 생존문제에 매달려 있는 언론후진국들의 외마디 소리들이 약간은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언론후진적 상황 가운데 한국이라는 나라도 ‘언론감시대상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한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안쓰러웠다. 하긴 IPI 총회에서 차베스의 독설들이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던 그 시각에 한국에서도 ‘조폭언론’에 대한 절독운동을 선동하는 난폭한 소음과 거친 욕설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나라는 언론 후진국이 되어 있고 조선의 올바른 부활을 위하여 절독운동을 펼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애정은 ‘선동하는 난폭한 소음과 거친 욕설’의 당사자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노무현?(거의 틀림없는 심증이다)은 대한민국의 차베스요 노사모를 비롯한 안티조선진영은 차베스처럼 악의적이고 왜곡된 언론관을 가진 모리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펼치는 안티조선운동은 ‘권력과 언론자유의 필연적 대립’이라는 등식에서 권력을 쫓는 것이 되고 조선은 언론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희생당하는 ‘희생양’이 된다.
차베스가 모든 방송사들로 하여금 그가 원하는 시각에, 2시간이든 3시간이든 원하는 시간만큼 그의 모든 연설을 생중계하도록 했으며 지지세력에 언론종사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압박하는 데 나서라고 선동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지지세력은 몇몇 비판적 언론인들을 ‘마약투약자’로 ‘밀고’하는 보도를 조작하기도 했고 비판언론에 정부가 제공하는 광고를 중단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다.
친노무현, 친개혁적 언론은 차베스의 어용언론처럼 인식되고 비판적인 조선은 ‘밀고’ 당하고 ‘재정적 어려움(세무조사 때처럼)을 겪는’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9시뉴스가 ‘전두환 대통령은 ~’으로 시작하여 뒤이어 ‘이순자 여사는 오늘~’로 이어지는 그야 말로 어용언론의 극치를 보여주던 시절이 있었다. 방송뿐이었겠는가? 신문도 너나없이 똑같은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뽑아내며 권력에 충성하던 시절이었다. 그 억울한 시절에 주연을 자청하며 권력에 기생했던 대표적 신문지가 조선일보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무슨 건물인가도 보안사 지하실에서 날름 삼킨 것이 조선일보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아니면 말고, 내가 잘 못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미리 고백하였으니 명예훼손 운운 하지 마시라)) 그 특혜의 대가였는지 5공에서 조선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기생언론 어용신문이었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역사의 기록들이 있다. 내가 굳이 그 실례를 들지 않아도 수긍하리라 믿는다.
그런 조선이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언론의 자유가 신장되는 기회를 틈타 이제는 대놓고 거드름을 피운다. 더 이상 기생언론이 아니라 오히려 정권을 시녀처럼 부리려 드는 것이다. 이 장단에 얼씨구나 따라 춤추는 수구꼴통들까지 가세하니 이 얼마나 행복한 풍경인가? 나는 제왕적 총재 너는 제왕언론 북치고 장구치며 풍악을 울리려는데 난데없이 네티즌들이 까불고 노아무개는 거품 물며 대든다. 노사모 명짱인가는 50만부를 아까운 종이로 만들어 벌이겠다고 으름장이니 속이 불편하다.
그래서 김대중은 나는 “불쌍한 기자여, 네 꼴을 보라”하며 국민들을 속이고 읍소하는 척 하는 것이다. 그가 국민 알기를 개X보다 못하게 아는 것이 들통 난 이 마당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사기극인가? 나는 정직하게 그대에게 충고한다. “불쌍한 조선이여, 네 꼴을 보라”
- 조선절독운동은 인권을 수호하는 것이다 {IMAGE2_LEFT}불과 3일 분량의 신문지에서 발견되는 조선일보의 반역사적 작태다. 도무지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쓰는 지식보부상이나 늙기도 전에 정신은 골병든 김아무개나 조선이란 마약에 스스로 중독 되다 못해 그 마약을 팔기에 혈안이 된 편집인이나 제 정신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이러니 조선이 제 정신이 들기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망상인지도 모르겠다. 조폭언론이 달리 조폭언론인가? 하는 짓이 조폭 같으니 조폭언론인 것이다. 조폭에게는 애당초 생각이라는 것이 불필요하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영원한 불문율이다.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하극상이다. 역사가 바라고 시대가 요청하는 사고를 거부하니 조선이 조폭언론인 것이다.
조선절독운동은 더 이상 소비자의 권리를 찿는 소극적 불매운동이 아니다. 이는 우리 민중의 생각을 호도하고 반역사적 우민화 정책에 골몰하는,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권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조선일보에 대한 인권운동의 시작이다. 인권은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언론의 자유란 그것이 인간의 고귀함을 존중하고 인권의 신장에 기여하며 진실한 사실을 정직하게 알릴 때 허용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하여 정보가 조작되고 가공되는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일 수 없고 사회의 공기로써 보호 받을 가치가 없다. 따라서 여지껏 자행한 반역사적 반사회적 죄상들에 대한 일점의 반성도 없이 오늘도 자신의 오염된 정신을 주술(呪術)하기에 미친 조선은 언론의 자유라는 신성한 가치로 보호받을 수 없다. 오늘 우리의 결의가 우리의 소중한 인권을 수호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