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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첩 김낙중의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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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기사입력 2003-04-30

나는 김낙중씨의 딸이다. 4월 22일, 국가정보원장 청문회를 지켜보며 착찹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청문회에서 여러 번 거론되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다. 전형적인 간첩. 38년 고정간첩, 암약했던 간첩, 최대 간첩, 간첩, 간첩.... 너무 많이 들은 이야기다. 남들은 한 번도 듣기 힘든 이야기를 나는 30년 동안, 아버지는 50여년 동안 들었다.

과연 간첩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는 “적국에 제공할 목적으로 자국의 군사상의 기밀을 탐지하거나, 군사기밀에 속하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라 되어있다. 그렇다면 ‘전형적인 간첩’ 김낙중이 38년 동안 팔아먹은 국가기밀은 과연 무엇인가? 민중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사람이면 누구나 구할 수 있었던 팜플렛이고, 뉴스나 시사지에 실린 내용의 이야기들 따위다. 아버지에게 간첩죄가 적용되는 것을 속상해 하는 나에게 “조총련계 사람에게 ‘한국에 우동집이 많다’는 이야기만 해도 국가기밀 누설이던 시절도 있었다“며 위로해 주시던 어느 변호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평생 등에 ‘간첩’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사셨던 아버지. 전쟁재발의 위험이 있었던 54년. 아버지는 혼자 ‘평화통일’을 주장하며 부산 광복동 거리를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라는 등불을 들고 홀로 평화시위를 하였다. 더 이상 이 땅에 피흘리는 전쟁은 없어야한다는 신념으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놈은 미친놈’이라며 정신병원까지 끌려갔던 아버지는 결국 55년 평화통일에 대한 일념으로 평화통일방안을 가지고 북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월북한 일로 정식재판을 받았다. 판결은 무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5.16직후, 10월유신 직후, 그리고 92년 대통령 선거 직전과 같은 정치적 변환의 시기마다 간첩으로 기소되어 사형, 무기징역이 언급되었다. 5.16직후의 사건에서는 간첩혐의는 무죄, 반공법 위반으로 3년 6개월형을 언도받았고, 10월 유신 직후의 사건은 간첩죄가 적용되어 7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70년대 사건은 담당 검사조차 기소를 포기하여, 다른 검사가 추가기소를 해야 했을 정도로 완전히 조작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예순을 넘기신 92년. 아버지는 당신이 평생 소신껏 살아오신 인생 전부를 오명으로 끌어안은 ‘38년 고정간첩’이 되었다. 38년동안 간첩행위를 했다는 주장은 아버지가 감옥의 독방에서 형을 살았던 10여년의 세월도 간첩행위를 했다는 이야기며, 과거 재판에 대한 전면 부정을 의미한다. 또한 아버지의 공소장과 판결문 어디에도 90년 이전에 간첩행위를 했다는 내용은 없다.

북한 서열22위라는 이선실 역시 공소장이나 판결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남조선노동당과의 연계 및 그 어떤 지하조직도 가담하거나 조직하지 않았으며, 국가기밀이나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내용 역시 단 한 개도 없다. 또한 아버지가 쓰셨던 그 많은 저서와 논문 어느 하나도 국가보안법에 위반되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폭력에 대한 옹호는 없으며, 폭력의 불가피성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없다.

4월 22일 국가정보원장 청문회에서 아버지가 안기부에 연행되었을 때, 7시간동안 진술을 하고는 남은 보름동안은 전혀 아무것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아버지는 연행되자마자 실정법을 어긴 당신의 모든 행동을 숨김없이 진술했다. 그런데 왜 보름동안 아버지는 안기부에 더 억류되어 있었어야 했을까. 당시는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보름동안 안기부가 추가로 원한 진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진술이 나오지 않을 때, 당시 안기부가 보름동안 아무런 고문도 하지 않고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었을까. 아버지께서는 내게 “사람으로 당할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을 겪었다”고만 말씀하시며 상처받을 딸을 염려하여 더 이상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 거짓 진술을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 악몽같은 보름은 버텼다.

아버지 사건을 맡은 판사가 판결 후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국제, 국내의 많은 탄원서와 자료 등을 받았다. 또한 이 사건의 경우 명확한 간첩의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이 사회에 미친 사회적 영향을 고려할 때에 중형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전형적인 38년 고정간첩’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22일의 청문회를 지켜보던 나는 그래서 안타까왔다. 이렇듯 56년, 62년, 73년 그리고 92년 되풀이하여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고문을 당한 아버지를, 사건의 실체와 달리 포장되고 과장되고 조작되어 이 사회에서는 천형과 다를 바 없는 ‘간첩’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순수한 인도적인 입장에서 석방요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직임명의 장애요인으로 지목하는 이러한 현실이 너무나도 서글펐다. 과연 우리는 화해와 협력의 21세기를 향하고 있는 것인가. 순수하게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살아오신 아버지의 한평생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제사면위원회는 판결 직후 “그의 행동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순수한 의지의 결과이고 그것이 국가안전에 해를 끼칠 수는 없다. 김낙중씨의 저서, 강의, 토론과 정치적 행동은 그가 항상 비폭력적인 평화적 통일을 추구해왔음을 보여준다. 국제사면위원회는 폭력의 옹호나 내용없이 북한사람과 만났다거나, 통일에 대해 논의했다는 것이 그의 구속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아버지를 양심수로 지정하였고, 아버지가 석방되는 날까지 애를 써 주었다.

국제펜클럽 역시 아버지를 명예회원으로 선출했다. 누구는 간첩이라 하고, 누구는 평화주의자라 한다. 간첩이 평화주의자일 수 없고, 평화주의자가 간첩일리 없다. 어느 한 가지는 진실이 아닐 것이다. 지금 모든 진실이 밝혀 질 수 없더라도, 그래서 이 오욕의 시간을 더 견뎌내야한다 할지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세월이 흐른 그 언젠가는 역사가 진실을 드러내 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김낙중 선생 약력]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6·25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민족적 현실에 눈을 뜬 그는 53년 7월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무력북진 반대! 평화통일 만세!」를 외치다 연행됐다. 이 때부터 그의 「통일 장정」이 시작됐다.

6·25전쟁 발발 5년째가 되는 날 그는 「더 이상 민족이 갈라져 싸워선 안된다」는 신념 하나로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넘어간다. 그는 북한 인사에게 자신이 작성한 「통일독립 청년고려공동체안」을 내보였지만 오히려 「미제의 간첩」으로 오인받아 체포된다.

북한당국은 이렇다 할 혐의를 밝혀내지 못하자 결국 그를 1년만에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 내지만 이번에는 미군으로부터 북한 간첩으로 몰려 취조받다 서울시경에 넘겨진다.

그는 구속돼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7 년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 처리됐다. 그러나 이 때부터 그에겐 「간첩혐의」가 원죄처럼 따라다녔다.

73년 초. 유신독재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지하신문이 나돌면서, 당시 모교인 고려대학에 서 노동경제학을 강의하던 그는 고려대생들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다시 징역 7년을 선고받는다.

그는 80년 5월 이른바 「서울의 봄」 때에야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이 후 저술활동에 매달려 자신의 성장 및 월북 과정을 그린 「굽이치는 임진강」을 비롯, 「사회과학원론」 「민족통일을 위한 설계」 등을 펴냈다.

그러던 중 90년 11월 민중당 창당 때 공동대표를 맡게 된 그는 92년 총선 때 각 지구당에 개인적으로 지원한 선거자금이 북한의 공작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생애 다섯 번째 간첩혐의로 구속 수감된다. 간첩 이선실 사건으로 수감 옥고를 치룬 분으로 장기수를 제외하고 분단 하에서 가장 오래동안 감옥에 있었던 분. 청년같은 마음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우리시대의 마지막 로만티스트이며, 고향 파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음.


* 본문은 '평화만들기' http://peacemaking.co.kr/ 6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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