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賞)이라면 무조건 좋은가 대개의 사람들은 문인이니 지식인이니 하는 이들을 뭔가 특별한 존재까지는 아니더라도 필부(匹夫)나 필부(匹婦) 쯤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식자들이 그 머릿속을 채운 지식과 식견으로 밥을 해결하거나 제 몸값을 높이는 데만 쓰는 '먹물'들이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기대는 감당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훈장' 대접받기를 포기하지 않는 문인들은 분명히 존재하며, 이들의 행적은 문학을 아끼는 이들을 적잖이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IMAGE2_LEFT}특히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수상자 만들기에 동원되는 문인들은, 그들 앞에서 사회적 책무를 운운하고, 문인의 자율성을 논하는 것의 어려움을 절감하게 만드는 이들이다. 7인의 종신심사위원들의 소설 품평은 일년 내내 그 지면에 등장하며, 수상 후보로 거론된 이들은 자신들의 성가를 확인하며 뿌듯해하고, 드디어 최후의 낙점을 받은 이는 가문의 영광으로까지 생각하고 감격해한다. 수상자는 소설가 김동인이 문학사적 평가에서 논란이 분분한 인물인지 아닌지는 알 바 없다. 조선일보가 어떤 정체를 가진 신문이며, 문학상을 운영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동료 문인 두 사람이 왜 그 상의 후보가 되기를 거부했는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권위 있는 문학상을 통해 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기쁘고도 어깨가 무거운 일일뿐이다.
이문열과 성석제본디 작가라는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불합리하지 않은가 하고 의심하며, 불 같이 환해 보이는 현상이라도 배후에 은폐된 진실이 없는지 회의하는 자이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그대로 진실이라 믿는 이들만 있다면, 문학이라는 언어활동의 욕구를 느끼는 이들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세계가 불만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작가는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세상이 과거에 비해 나쁘지는 않지만 여전히 불편하다는 쪽과, 옛날과 달라서 싫다는 쪽이 있다. 대다수는 앞의 경우지만, 매우 드물게 후자의 경우도 있다. 이문열이 대표적인 사례로서, 그는 세계가 왜 옛날만큼 힘있는 자에게 지배받지 못하느냐고 항의하며,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고 '아랫것'들이 주인인 양 설치는 지금이 못마땅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삼국지에나 나올 법한, 주군에게 초개같이 목숨을 바친 가신들이나 순장 풍습에 희생된 이들, 가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 여성들이 있던 그 옛날이 눈물겹게 아름다운 사람이 그다. 이런 위인에게 왜 조선일보와 친하냐고 묻는 것은 소 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다. 상식적인 수준의 사고에도 미달하는 사람의 눈에는 상식을 무시하는 신문의 존재가 이상할 것 없으며, 힘이 정의라고 믿는 이에게 힘있는 신문이 여론을 독점하는 것은 순리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이문열 같은 수구주의자나 전근대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작가들이 극우신문과의 관계를 선명하게 정리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세계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저항으로 직결하거나, 일개 신문의 비상식적인 논조가 여론을 호도하는 현실이 어이없다고 하여, 그 신문사가 운영하는 문학상에 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꺼리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현실의 불합리를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무력한 소시민이라고 느끼는 작가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올해 동인문학상 수상자 성석제 씨의 수상 인터뷰와 수상작에서 느낀 점이 그와 같다.
[관련기사]김수민, 황만근의 보호자, 성석제 선생께 질문한다, 대자보 92호 이명원, 문학상, 매체, 문학권력, 대자보 34호 [참고기사][상금 5000만원] 33회 동인문학상 시상식 (조선일보 2002.11.05) 성석제는 수상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현실은 진실과 거짓이 분명하지 않은 세계이며, 그런 것을 소설로 쓰려고 했다고 말한다. 수상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창작과비평사, 2002)에는 세상이 용납하지 못하는 바보나 기인, 건달끼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자는 상식의 눈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방외인들을 위해 그들을 대변하는 공간을 소설에 마련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보나 기인은 끝내 어이없이 죽게 됨으로써 세계로부터 추방당하고 만다. 이는, 철옹성같이 빈틈없고 합리적인 세계의 엄혹성을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가 의심스럽기는 하되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비관적 인식은 패배주의로 치달을 여지가 다분할 것이다. 이 점은, 작가 자신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계몽주의자도 아니며 자신의 소설이 사회를 직접 비판하지도 않는다는 발언에서 느껴지는 소극성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세상에 대해 소극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면, 현실의 쟁점에 대해 깊숙이 개입하는 데 적극적이거나, 문학이 언론이나 출판사에 휘둘려 자율성을 견지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제도와 타협하지 않을 가능성은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황만근들을 낳은 작가가 수구이데올로그인 거대언론사가 주최하는 문학상을 의심하지 않고 기쁘게 수상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 있지 않을 것이다.
주군과 가신들 동인문학상의 위력은 조선일보의 문단에 대한 장악력의 강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영향력은, 작가를 상금으로 구슬리거나 자신들에게 밉보이는 문인들에게 불이익을 줄 만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인문학상의 힘은 단독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출판 자본과 결탁하고 심사위원들을 하위 동조자로 삼아 실행된다.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한 출판사는 지지난해 유력한 수상 후보가 후보 자리를 틀어버리는 바람에 손에 들어오던 떡을 놓쳤지만, 올해는 삼 세 번만에 수상자를 내는 경사를 맞이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문학상의 위력은, 한 출판사로 하여금 그 상의 주최측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상충되는 집단인가 아닌가 따져보는 일도 가로막을 정도로 거세다.
{IMAGE1_RIGHT}평론가 정과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면서 장차 '괴물'을 순화시킬 '꽃'이 되리라 장담했지만, '7인의 사무라이'라는 말이 더 어울려 보이는 종신심사위원들. 고급 한정식집이나 온천이 딸린 호텔을 돌며 작품을 독회하는 이들은, 두 해 전 저희 손으로 후보에 올린 작품들에게 오만한 품평을 늘어놓으며 위세를 과시해보려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그러나 정승 댁의 청지기라도 주인 앞에서야 하인에 불과한 법이다. 그들은 싫든 좋든 주군의 바람막이가 되어야 하며, 제 소신과 관계없이 주군의 입맛에 맞는 문학에 동의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은, 그들 입이 말해주고 있다.
▲사진설명 : 제 33회 동인문학상 시상식이 5일 오후 조선일보 7층 강당에서 열렸다.앞줄 왼쪽부터 김주영,이문구,성석제씨 부부,방상훈,박완서,유종호,정현종씨.뒷줄 왼쪽부터 전인초,김훈,김우식,김광명,이청준,이문열,정과리씨(출처 : 조선일보)
이들은 올해 수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 하나같이 "현실에 대한 종속관계에서 벗어나, 현실 밖에서 말(언어)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고 말한다. '현실에 대한 종속관계'에 있는 문학이란, 앞 뒤 문맥으로 보아 80년대를 풍미한 리얼리즘 계열의 문학을 이른 말이다. 이문열 같은 반리얼리스트는 물론이고 이청준이나 유종호, 정과리 같은 비리얼리스트, 심지어 박완서 같은 리얼리스트에 포함될 수 있는 이도 망라된 심사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리얼리즘 문학을 폄하하거나 그것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상의 심사위원 자리가 주최측의 정치적 입장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 그들이 자율적인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주군의 입에 혀같이 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리얼리즘 문학이 현실의 힘에 압도되어 미적 반영에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90년대 이후 그 영향력이 현저히 축소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공과를 떠나 사회 모순을 직시하고 현실의 정직한 반영을 주창한 리얼리즘 문학에 대해, 과거의 이력에 중죄가 있는 조선일보가 절대로 호의적일 리는 없다. 즉 현실 밖의 세계에 관심 있는 문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심사위원들의 말이 거짓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리얼리즘과 거리를 둔 문학을 선호하는 저희 주군의 구미를 반영한 발언이기도 한 것이다. 가뜩이나 허황되거나 현실에 맥락을 두지 않는 작품이 활개치는 마당에, 조선일보의 입김이 그런 작품의 융성을 조장하는 등 문학 판도까지 힘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종신심사위원이라는 막강한 문단의 위세를 보장받은 이들도 주인 앞에서 '알아서 기는' 처지인데, 힘없고 가난한 작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작가인가, 소시민인가 모든 문학의 조류는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리얼리즘이든 환타지 문학이든 마찬가지다. 동인문학상의 심사위원들이 잊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문학을 통해 현실 밖에서 세계를 구축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그것은 현실에 대한 패배의식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동인문학상이 '바보'나 '기인'이 세계 바깥으로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각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무력감을 드러낸 작가를 선호한 것도,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패배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점은 작가를 주어진 세계에 충실히 살아갈 뿐인 소시민이자 범속한 개인으로 설정하는 시각과 겹쳐질 수밖에 없다. 작가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일개 범부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압력에 저항하지 않는 한, 독자로부터 굳이 작가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독자를 더 오도하기 전에, 글 쓰는 이들은 자신들이 생계를 위해 글을 다루는 사람일뿐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통념에 걸맞는 '작가'인지, 자신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폭력적인 현실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이 세상에 던진 말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소수의 작가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