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검색

카메라로 역사를 증언한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

가 -가 +sns공유 더보기

임순혜
기사입력 2025-09-26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원제 Lee)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증인이 된 모델이자 예술가, 그리고 전쟁 사진가였던 여성, 리 밀러의 삶을 다룬 영화다.

 

촬영감독 출신의 엘렌 쿠라스 감독이 연출하고, 주연은 케이트 윈슬렛이 맡은, 한 여성의 전기적 서사를 넘어, 기록과 기억, 증언의 윤리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여우주연상-드라마 후보로 올랐고, 제7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영국) 후보로 오른 영화다.

 

▲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의 한 장면     ©(주)영화사진진

 

원래 패션 모델로 이름을 알렸던 리 밀러(케이트 윈슬렛)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사진가로 활동하다, 전쟁이 시작되자 런던 대공습과 전장의 참상을 직접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최전선으로 향하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다.

 

영화는 이 화려함에서 참혹함으로의 전환한 삶을 영웅적 드라마로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모순된 정체성을 지닌 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의 한장면  © (주)영화사진진


영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있다. 리 밀러가 찍은 나치 수용소 해방 장면, 그리고 히틀러의 욕실에서 촬영한 사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역사적 아이콘이 되었다.

 

이 장면들은 카메라가 기억을 어떻게 형성하고, 또 어떤 윤리적 무게를 지니는지 묻는다. 고통을 목격하고 사진으로 남긴다는 행위는 과연 증언일까, 혹은 타인의 상처를 소유하는 또 다른 폭력일까. 영화는 그 답을 단정하지 않고, 관객에게 질문으로 남긴다.

 

▲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의 한장면  © (주)영화사진진


전쟁은 늘 남성들의 서사로 기록되어 왔으나, 리 밀러는 여성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본다. 그녀가 카메라에 담은 얼굴들은 승리의 영웅담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인간의 초상이었다.

 

영화는 이 지점을 충실히 포착한다. 케이트 윈슬렛은 과장된 감정을 배제하고 억눌린 분노와 피로를 세밀하게 표현하며, 리 밀러를 영웅이라기보다 증언자의 위치에 세운다. 이것은 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침묵되었는지를 되짚는 과정이기도 하다.

 

▲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의 한장면     ©(주)영화사진진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은 전쟁 영화에서 흔히 기대되는 전투 장면이나 긴장감 넘치는 연출을 과감히 배제한다. 대신 차갑고 무채색에 가까운 톤, 사진적 질감을 강조한 화면을 통해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한다.

 

이로 인해 관객은 때로 감정적으로 몰입하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영화를 바라보게 된다. 바로 그 거리감이 영화의 핵심으로, 리 밀러가 카메라 너머에서 역사를 기록했듯, 관객 역시 화면 너머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의 한장면     ©(주)영화사진진

 

영화는 전기 영화의 전형적 구조를 차용하면서도, 그것을 해체하고 전복하는 방식으로 전쟁과 기록의 문제를 다룬다. 영화가 관심을 두는 지점은 그녀의 이력서적 전환이 아니라, 기록이라는 행위가 지닌 윤리적·정치적 함의다.

 

대다수의 전쟁 영화가 영웅적 서사와 감정적 고양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키는 데 반해,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은 일정한 거리 두기를 고수한다. 그녀는 승리의 기념비를 세우는 대신, 폐허 속의 얼굴들을 포착했다.

 

이 같은 관찰자의 시선은 영화적 서사에서도 반복된다. 이는 단순히 연출상의 선택이 아니라, 리 밀러의 사진가적 태도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관객은 전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록된 방식을 성찰하게 된다.

 

▲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의 한장면     ©(주)영화사진진

 

영화가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이다. 나치 수용소 해방 장면, 히틀러의 욕실 사진은 그 자체로 강력한 이미지의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기록의 폭력성을 지우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포착하고 그것을 역사 속에 남기는 행위가 과연 순수한 증언일 수 있는가. 영화는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기록과 침묵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드러내며, 관객을 불편한 질문 앞에 세운다.

 

▲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의 한장면     ©(주)영화사진진

 

쿠라스 감독은 촬영감독 출신답게 사진적 질감을 영화적으로 재현한다. 무채색 톤, 정적인 화면, 과장 없는 연출은 리 밀러가 남긴 사진과 자연스럽게 호응한다. 하지만 바로 이 미학적 선택은 관객의 감정적 동일화를 차단한다. 이는 결핍이라기보다 의도된 전략이다. 관객은 영화의 서사에 몰입하는 대신,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와 기록의 층위로 바라보게 된다.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은 전기 영화로서의 완결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인물의 삶을 통합적 서사로 봉합하는 대신, 단편적이고 모순적인 파편들을 남겨둔다. 그것은 마치 사진 한 장이 역사의 일부만을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영화 역시 불완전한 증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 영화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 포스터  © (주)영화사진진


이 영화의 가치는 바로 그 불완전함에 있다. 기록은 진실을 남기는 동시에 침묵을 생산한다.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은 이 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게 함으로써, 전쟁 영화의 전형적 서사와 관습적 감동을 넘어서는 자리에 도달한다.

 

결국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전기 영화의 교훈을 넘어선다. 리 밀러의 삶은 기록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카메라는 진실을 증언하지만, 동시에 말하지 못하는 침묵을 남긴다. 영화는 그 모순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우리에게 역사를 다시 바라보라고 말한다.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은 화려한 드라마틱 전환보다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전쟁을 기록하는 여성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들이 존재함을 깨닫게 한다. 이 영화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된 관객에게 오래도록 잔향을 남길 것이다.

 

'리 밀러 : 카메라를 든 여인'은 9월24일(수) 개봉이다.

 

댓글
댓글 수정 및 삭제는 PC버전에서만 가능합니다.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맨위로

Copyright 대자보. All rights reserved. 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