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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한자가 피터지게 싸우는 문자전쟁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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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대로
기사입력 2021-06-20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부터 한글전용 정책을 강력하게 펼치겠다고 발표했을 때에 나는 기뻤고 앞으로 그 정책이 잘 시행될 것이라 믿었다. 정부가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모습으로 봤다. 그래서 우리 국어운동대학생회는 정부가 그 발표를 한 뒤 허웅 지도교수를 모시고 북한산으로 축하 들놀이까지 갔었다. 그리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1970년에 군에 입대를 했고, 1972년 전역 세 달을 앞두고 함께 국어운동을 한 이봉원 군에게 나는 제대를 하면 농촌운동에 더 힘쓸 것임을 밝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게 도와달라고 편지를 했었다. 그러나 제대를 하고 보니 세상은 내 생각과 달랐다.

 

▲ 1968년 정부가 한글전용을 하겠다고 발표한 뒤 국어운동대학생회 회원들은 허웅 지도교수를 모시고 북한산에 축하 들놀이를 했을 때 사진(왼쪽). 오른쪽부터 이대로, 허웅 교수, 여학생 건너 서울대 이봉원 회장, 1970년 학훈단 소위 임관식 때 나와 이봉원 뜻벗 사진(오른쪽).     © 리대로

 

 

국회가 의원 이름패와 휘장을 한글로 바뀌고 군대 전우신문이 한글로 나오는 것을 보고 신문도 한글전용을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 때 조선어학회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도 만들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까지 치른 서울대 국문과 이희승 교수가 1969년 말에 한국어문교육연구회라는 한글전용 반대 운동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군사정부 2인자라는 김종필 총리가 한글전용 정책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들도 한글전용을 하지 않고 한자혼용하자는 이들을 돕고 있었다. 거기다가 1970년에 한글전용 운동에 앞장섰던 최현배 한글학회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뜨고 국어운동대학생회 지도교수였던 허웅 교수가 한글학회 회장으로 있었다. 북한은 광복 뒤부터 한글전용을 하고 신문도 한글로 냈기에 우리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서울대 이희승 교수와 그 제자 남광우 교수가 한자혼용운동에 나서니 많은 서울대 출신 학자들과 국어 선생들이 그들을 따르고, 군사정부 2인자인 김종필 총리와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강력하게 한글전용을 반대하고 나서니 일본 식민지 교육으로 혼자혼용에 길든 공무원들이 그들을 따르고 좋아했다. 그리고 이희승 교수와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된 한자혼용 세력은 이름씨, 그림씨처럼 우리 터박이말로 만들어 쓰던 말본 용어를 못 쓰게 하고 명사, 형용사같은 일본 한자말로 쓰게 하더니 광복 뒤부터 교과서에 살려서 쓰던 쑥돌, 흰핏돌같은 우리 토박이말을 교과서에서 빼버리고 화강암, 백혈구같은 일본 한자말로 바꾸고 교과서에 일본 말투 글이 늘어났다. 그리고 국회는 1973년에 한글로 바꾸었던 국회 보람과 국회의원 이름패를 한자로 다시 바꾸었다.

 

▲ 한글전용을 반대한 이희승 교수와 그 제자인 남광우, 김종필 국무총리와 민관식 문교부장관     © 리대로


그런데 나는 한글전용 정책이 잘 시행될 줄 생각하고 19726월 군대 전역을 하고 국어운동대학생회 지도교수였던 허웅 한글학회 회장을 인사차 찾아뵙고 저는 앞으로 농촌에 들어가 농촌운동에 힘쓴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더니 허웅 회장은 너희 젊은 대학생들이 애써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전용 정책을 펴기로 했으나 그 반대 세력이 뒤집어 업고 있다. 졸업생들이 후배들을 잘 이끌고 한글운동을 더 힘차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현배 회장은 일제 때부터 한글운동을 한 분이었으나 투쟁 경험이 적고 젊은 허웅 교수는 일본식 한자혼용주의자들과 싸워야 하는 막중한 한글학회 회장을 맡고 몹시 힘들어했다.

 

그래서 우리 국어운동학생회 출신들이 다시 모여서 지도교수였던 허웅 한글학회 회장을 도와 한자혼용 세력들과 싸우기로 하고 1972년 한글날에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를 결성했는데 내가 회장이 되었다. 그래서 농촌에 들어가는 것을 미루고 한글과 한자 싸움판 선봉에 서게 된 것이 내 일생 과업이 된다. 광복 뒤 미국 군정 때부터 한글로 교과서를 만들고 한글을 살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대한민국 문교부까지 이어온 것은 최현배 교수가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일하면서 뿌리가 내린 것인데 갑자기 최현배 한글학회 회장이 세상을 뜨고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김종필이 국무총리가 되어 설치니 문교부도 차츰차츰 한자혼용 분위기로 바뀐다.

 

그때 민관식 문교부장관은 중, 고등학교 필수교육 한자 1800자를 정하면서 한자 교육을 강조하고 한글전용 분위기를 흔든다. 그리고 박정희 유신정치를 반대하던 김종필이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국회의원이 되고 총리가 되니 8대 국회 때 한글로 바꾸었던 국회의원 보람과 이름패를 다시 한자로 바뀐다. 그리고 신문과 방송은 말할 것이 없고 사회 곳곳에서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고개를 들고 날뛰니 광복 뒤 우리말을 살려서 한글로 적자는 분위기는 식고 시들해진다. 한글이 태어날 때부터 한글을 못살게 구는 자들이 있었고 광복 뒤부터 일본식 한자말을 한자로 적자는 자들이 있었지만 한글을 살려서 쓰는 것을 반대하는 모임까지 만들어 터놓고 한글에 저항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그러니 문자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한글과 한자 싸움이 치열하게 된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 국어학자들과 성균관 유학 세력에다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들 언론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한글만 쓰기를 가로막고 김종필 같은 친일 정치 세력이 그들을 밀어주니 한글전용을 찬성하는 학자들은 몸을 사리고 움츠린다. 그래도 한글학회와 젊은 국어운동대학생회만 정부에 건의하고 한글을 지키고 살리겠다고 몸부림을 친다. 나는 정부가 1970년부터 한글전용을 강력하게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한자혼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회장 이대로) 이름으로 9대 국회 때 국회 휘장과 이름패를 한자로 되돌리면 안 된다고 건의했으나 듣지 않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여러 의원들 도움을 받아 한글국회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 결과 19대 국회 때 노회찬의원(https://omychans.tistory.com/374)함께 그 일을 마무리 했다. 그렇듯이 40여 년 동안 1968년 정부가 시행하기로 했다가 안 한 일들인 공문서와 교과서, 신문이 한글전용을 하게 만들었고, 국회 휘장과 국회의원 가슴에 다는 보람과 국회의원 이름패를 한글로 바꾸게 하고, 한글나라를 만들려고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고 한글박물관을 세우게 하고 우리말을 살리고 지키려고 친일 반민족 사대주의자들과 싸운 일들, 그리고 이런 일을 함께 하고 도와준 분들 이야기를 앞으로 이어서 밝혀 쓸 것이다.

 

▲ 1973년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회장 이대로)는 사법부와 행정부 휘장은 한글이며 한글전용법이 있는데 국회가 다시 휘장을 한자로 되돌리면 안 된다고 건의하고 받은 국회 회신(왼쪽).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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