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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참 스승 큰 어른 이상보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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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대로
기사입력 2020-10-27

 내가 한글운동을 하면서 우러러 모신 스승 세 분이 있다. 첫 번째 스승이 한글기계화운동을 하신 공병우 한글문화원 원장이셨고, 두 번째가 한글날국경일제정국민위원회 전택부 위원장이셨고, 세 번째가 한글단체 연합회인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이상보 회장이시다. 세 분 모두 날 믿어주시고 사랑해주셨고 내가 오랫동안 모시고 일하면서 참 삶과 사랑을 깨닫고 배우게 한 참 스승이고 큰 어른인데 모두 마지막 가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병우 박사님은 돌아가신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시고 장례식도 안 치르셨기에 가시는 모습을 뵐 수 없었고 , 전택부 장로님은 내가 중국 대학에서 일할 때여서 가 뵙지 못했는데 이상보 교수님은 며칠 전에 뒤늦게 알아서 가시는 모습을 뵙지 못했다.

 

나는 칠십 평생 한글운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내게 힘나게 한 고마운 분도 있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잘 이끌어주는 어른도 있었고 잘 도와주는 젊은이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승을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쳐주신 분들을 말하는데 난 학교가 아닌 한글운동을 하면서 모시고 일하는 동안 뜨거운 감동과 깨달음을 주신 분들, 나를 믿어주시고 알아주신 분들을 참 스승으로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 위에 말한 그 세 분이 돌아가시기 전 십 수 년 동안 내가 모시고 일한 분들이고 나도 늙으면 저 분들처럼 고귀하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고 존경한 분들이다.

 

그 세 분 가운데 며칠 전에 돌아가신 이상보 스승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가실 때 절도 못해서 죄송스럽다. 그 잘못과 아쉬움을 지난날 모시고 일하면서 보고 깨달은 몇 가지 일을 되새기는 일로 달랜다.  다른 이들도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듣고 나처럼 감동하기 바라면서...

 

첫째 기독교 사랑 정신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삶이었다.

 

전택부 기독청년회 명예총무님은 교회 장로지만 십 수 년 동안 모시고 일하는 동안 내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말한 일이 없다. 그런데 한실 선생님도 십 수 년 모시고 일하는 동안 교회 장로였던 티를 내거나 기독교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 하셨는데 요즘에야 은퇴 장로임을 알게 되었다. 두 분 모두 참 사랑을 실천하고 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내게 참 종교인으로 느끼게 하셨다. 언젠가 내가 선생님께 점심을 대접해드리겠다고 했더니 사모님이 입원한 병원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사모님은 식물인간 상태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점심때엔 꼭 병원에 가서 사모님에게 밥을 떠먹이면서 집안 이야기와 밖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셨다.

 

그날도 사모님에게 밥을 떠먹이시면서 “내가 자주 말하던 한글운동가 이대로 선생이야”하셨다. 아무 반응이 없어도 내 이야기를 더 하셨다. 참으로 감동스런 모습이었다. 80대 노인이 혼자 사시면서 스스로 밥을 해 드시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날마다 점심때엔 꼭 병원에 가셔서 그렇게 사무님에게 밥을 떠먹이고 나와서 점심을 드셨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언제나 따스하게 사랑을 느끼게 말하고 그들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붓글씨로 축하와 칭찬하는 족자를 만들어 선물하셨다. 수필가이셔서 글도 잘 쓰시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정성 들여서 붓으로 글을 써 주셨다. 내게도 상을 받거나 남다른 일이 있으면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고 붓글씨를 써주셨다.

 

▲ 한실 이상보 교수님이 내게 남다른 일이 있을 때마다 써주신 말씀과 붓글씨다.     © 리대로

 

내가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우리말을 가르치려고 가 있을 때에는 그곳까지 격려말씀을 쓴 족자를 가지고 오셔서 내가 그 대학에 만든 태권도장과 ‘세종학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우리 문화를 가르치는 곳을 들러보시고 그 대학 총장에게 내 자랑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때는 내가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사무총장으로 한실 이상보 회장님을 모실 때인데 일을 똑바로 잘 하라고 말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글씨로 스스로 깨닫고 잘하도록 가르치고 이끄시는 것이었다. 말로 하는 지시나 잔소리보다 백 배 효과가 있는 어른다운 모습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배우고 본받아 실천하고 싶다.  


둘째, 높은 인품과 인격을 갖춘 큰 어른이었다.

 

16대 국회 때 전택부 선생님을 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위원회 회장으로 모시고 내가 사무총장을 맡아 신기남 의원과 함께 엄청나게 애썼지만 안 되어 한글단체에서는 실망하고 포기할 상태였다. 그때 나는 여당 의원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17대 국회에 야당이 참여한 한글세계화의원모임을 만들자고 하고 마침 이상보 교수님의 사위인 정두언 의원이 야당 국회의원이 되었기에 간사를 맡고 한글운동 내 뜻벗인 노회찬, 임종인 의원이 힘을 보태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법 안을 통과시켰다. 그 때 이상보 교수님은 내게 정두언 의원을 앞장세우라고 했고 정두언 의원도 발 벗고 뛰어서 그 일을 마무리한 것이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에 이상보 교수님이 숨은 공로자였지만 스스로 한 일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그리고 한글박물관 건립도 이상보 회장님을 모시고 해낸 일이다. 2009년 나는 한글학회 김승곤 회장을 한글문화관건립준비위원장으로 모셨다가 그 일이 추진될 때에는 이상보 교수님을 건립위원장으로 모시고 국회에서 정두언 의원과 여러 의원이 도와주어 건립 예산도 따 내서 건립할 수 있게 했다. 한글이 훌륭하다고 하면서 외국인이나 학생들이 한글이 어디서 누가 만들었고 살아왔는지 보여주고 알려줄 곳이 없기에 한글역사를 알려주고 한글발전 기지가 필요해서 한글문화관을 세우게 했다. 그런데 그 전에  디지털박물관을 만들면서 나라 돈 맛을 본 한 어용교수와 공무원들이 결탁해 이름을 한글박물관으로 바꾸고 처음 건립 목적을 무시하고 고문서 수집 전시관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2014년 개관식에 갔는데 어떻게 해서 한글박물관이 짓게 되었는지 그동안 건립 추진 과정에서 김승곤 한글문화관건립준비위원장과 이상보 건립추진위원장과 여러 사람이 어떻게 애썼는지 경과보고에서도 빼버렸고 초청 인사들에게 개관 기념품을 주는데 이 두 분에겐 명단에 없다고 안 주었다. 시골에서 다리를 하나 놓더라도 그 지역 원로가 나와서 개통 띠를 자르는데 이 두 분은 아흔 살을 바라보는 분들로서 참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고 건립에 공로가 큰 분들인데 그렇게 푸대접하는 것을 보니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 때 김승곤 회장님도 기분이 안 좋은 내색을 했으나 이상보 교수님은 아무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인품과 인격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 때 나는 전택부 장로님이 “대한제국 때 기독청년회를 창립하고 한글로 ‘사민필지’라는 교과서를 처음 쓰고 고종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헐버트 박사를 일제 때 친일 기독교인들이 기독청년회 연혁에서도 빼버렸다. 그리고 내가 기독청년회 회관을 짓게 했는데 다 짓고 나니 목사들이 나를 와이임씨에이에서 몰아냈다. 일을 안 한 이들이 일한 너를 없인 여긴다고 서운해 하지 말고 네 갈 길을 묵묵히 가라. 언젠가 알아줄 거다.”고 한 말씀이 떠오르고 이상보 교수님이 전택부 장로님과 같은 생각을 행동으로 내게 보여주시는 거로 생각하고 참았다.

 

▲ 2009년 한글문화관건립추진위원장으로 한글문화관 어디에 지으면 좋을까 토론회 때 모습.     © 리대로

 

3. 참사람, 참스승이셨고 큰 어른이셨다.

 

두 해 전에 한글학회에서 행사를 하고 이상보 교수님이 댁으로 가시는데 김승곤 한글학회 전 회장님이 따라 나오면서 이 교수님께 택시비를 주시니 버스를 타고 가니 괜찮다고 받지 않으셨다. 그러니 김 회장님이 “며칠 뒤 스승의 날인데 오늘 뵈었으니 택시비라도 드려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라시며 주머니에 넣어주시고 버스 타는 곳까지 따라 가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상보 교수님은 92살이고 김승곤 회장님은 90살로서 같이 늙어가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찍그림을 남기려고 전화기를 꺼냈는데 학술회의 중 전원을 꺼놨기에 찍지 못하고 이상보 교수님이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회장, 김승곤 교수님이 한글학회 회장, 내가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회장일 때에 서울시에 말해서 만든 한글가온길 표지석 앞에 서시라고 하고 찍었다.

 

▲ 2018년. 한글회관 아래 한글가온길 표지석 왼쪽이 이상보 교수님, 오른쪽 김승교 회장.     © 리대로

 

그리고 이상보 교수님이 버스를 타고 떠나신 뒤에 김 회장님께 어떤 사이신지 물었더니 “내가  6.25 전쟁 뒤 야간대학에 다닐 때에 스승이시다. 그 때 내게 앞으로 끝까지 공부해 큰 인물이 되라고 붓글씨를 써주셨다.”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참 스승이시다고 하셨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60년대만 해도 야간대학에 나이가 많은 이들이 있었고 이상보 교수님도 나이 들어 공부하셔서 교수까지 하신 분이다. 지금도 이상보 교수님은 가까운 이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담은 글을 써주시고 있는데 70년 전부터 그러셨다니 감동스러웠다. 이상보 교수님도 훌륭하고 아흔 살 제자 김승곤 교수님도 훌륭해서 “제가 또 배웁니다. 존경합니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 밖에도 한실 이상보 교수님은 비싼 음식보다 된장찌개나 짜장면을 좋아하시고 택시보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시며 검소하고 성실하게 사시는 것, 정년 퇴임 뒤에 외국 여행을 많이 다니시며 세계여행 길잡이 책을 내시기도 하시는 등 노년을 뜻있게 보내시는  삶이 아름답고 본받을 일이고 그 밖에 더 많지만 줄인다. 오늘날 스승이 없고 어른이 없다고 하는데 이런 어른들을 모시고 한글운동을 한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그동안 스승님으로부터 배운 참삶과 참사랑 실천을 본받을 것을 다짐하면서 하늘나라에서는 편안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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