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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잠수함전쟁과 <천안함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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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기사입력 2013-10-17

난데없는 영국 총리 방한

1996년 3월 5월. 전날 한국을 방문한 존 메이저 영국 총리가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언론은 이날 한영정상회담이 양국의 접촉이 처음 이루어진 지 200년이 된 해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루어졌다고 소개했다.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경제와 안보에서 긴밀한 협력을 다짐하는 공동합의와 함께 향후 우의를 다지는 알찬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굳이 사람들이 기억도 못하는 ‘한국과 영국의 첫 만남 200년’을 굳이 메이저 총리가 한국에 와서 기념해야 할 만한 사안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796년에 세계 해도(海圖)를 작성하기 위해 출항한 영국의 프로비던스호가 부산항에 와서 물을 얻어먹고 갔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 사람도 거의 없다. 갑자기 궁색한 이유를 내세워 영국 총리가 한국에 온 배경에는 모종의 ‘전략적 결정’이 있었다.

사건은 2월 초에 일어났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극심한 전라도 군산 인근의 어장에서 한 달 후에 영국 총리까지 한국으로 불러들일 만한 초대형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2월 초의 군산 외항 지역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거의 6미터에 육박한다. 새벽 2~3시경에 524~632센티미터로 정점에 달하던 만조는 이후 급속히 빠지기 시작해서 아침 8~11시경에는 12~42센티미터까지 내려앉는다. 이런 자연적 특성을 안다면 감히 어떤 잠수함이 함부로 연안으로 접근하겠는가? 새벽에 멋모르고 연안으로 들어온 영국의 뱅가드급 핵잠수함이 급속히 물이 빠지던 아침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갯벌에 그대로 갇혀버렸다. 여명의 아침에 어장을 살펴보던 주민들은 커다란 고래 모양의 검은 물체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갯벌에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민의 신고로 군부대가 출동한 것과 거의 동시에 토머스 해리스 주한 영국대사는 우리 국방부에 긴급히 영국 잠수함의 좌초 사실을 알리며 구조를 요청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1600톤의 무게에 149미터 길이와 12미터 폭의 뱅가드급 핵잠수함은 영국 해군의 주력이었다. 1995년부터 영국 해군에 인수된 문제의 잠수함은 탄생과 더불어 시작한 첫 항해를 중국의 서해 연안을 정찰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1월에 마카오와 홍콩 근처에서 정찰 활동을 하다가 상하이 쪽으로 중국의 연안을 따라 북상하던 이 잠수함은 2월 초에 한반도 부근으로 선회했다. 정찰 활동은 극비리에 이루어졌으나 한국 연안을 따라 남하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 들어왔다가 재앙을 맞이한 것이다.

국제법상으로 잠수함이 남의 나라 영해에 들어갈 때는 사전에 상대국에 통보하고 반드시 부상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전략무기가 상대방 몰래 수중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중대한 주권 침해이자 도발 행위였다. 일단 영국 잠수함에 대한 조사와 구조를 마친 국방부는 이 사건이 중대하고 복잡한 정치·군사적 문제라는 점을 직감하고 국방연구원(KIDA)으로 하여금 후속조치 방안을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국방연구원에서 국제법 학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팀(TF)은 토머스 해리스 영국대사를 불러들여 구조에 소요된 경비를 정산시키는 동시에 영국의 국제법 위반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이 사건의 중대성을 모를 리 없는 영국대사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풍성한 경제협력 선물을 들고 메이저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먼저, 영국과 같은 해양 강국은 항상 전 세계를 정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주요 연안에 대한 정찰과 해저 지도를 작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200년 전의 프로비던스호가 아시아를 항해하던 것과 같은 목적이다. 해양력을 통해 19세기까지 패권을 누리던 영국의 오래된 해양력 중시 경향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 특히 중국의 안마당까지 핵잠수함이 몰래 들어간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제국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영국은 미국과 함께 전 세계에서 전쟁을 했고, 새롭게 황금이 몰려들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연안에 ‘국가의 이익’을 설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서해안이야말로 외국 잠수함이 작전하기 어려운 천혜의 장벽이라는 점도 드러났다. 짙은 염분은 잠수함의 탐지장비인 소나의 음향을 산란시켜 잠수함의 귀를 멀게 했다. 여기에다가 서해의 탁한 바다는 시계(視界)를 흐려 눈을 멀게 했다. 더 치명적인 것은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이였다. 최대 7미터에 달하는 간만의 차이로 생기는 세찬 물결과 소용돌이는 잠수함이나 그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했다. 세계 최첨단의 영국 잠수함도 꼼짝 못하고 조난당하게 한 바로 그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 “서해에는 잠수함이 못 들어온다”는 상식이 굳어졌다. 이후 ‘잠수함의 무덤’이 된 서해는 오랫동안 안전한 바다로 여겨졌다.

동해에서 벌어진 사건
 
영국 잠수함 사건이 벌어진 때와 비슷한 시기 강릉 인근의 어두운 밤바다.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 한 척이 동해 연안을 정찰하고 부상한 상태에서 밸브가 고장 났다. 잠수할 때 주수를 하고 부상할 때 배수를 하는 잠수함의 숨구멍이 바로 밸브다. 여기에 고장이 났다면 주수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잠수를 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잠수정이 찌그러진다. 즉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기의 순간에서 함장인 북한군 소좌는 9명의 승조원과 함께 운명적인 결심을 했다. 부상한 채로 북상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해안에는 한국군 초병들의 열상감시장비와 해안감시레이더가 깔려 있는 상황이다. 이걸 피할 수 있을까? 일단 운명에 맡겨보기로 했다.

조용히 밤 물살을 가르며 잠수정이 북상을 시작했으나 해안에서는 아무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유유히 북상에 성공하여 함경남도 모 기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북의 동해 잠수함 기지는 차호, 마양도, 원산, 퇴조 네 곳이다. 모두 함경남도에 있다.

정작 놀란 당사자는 북한 동해사령부의 지휘부였다. 부상한 채로 남측의 감시망을 뚫고 올라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견한 일이었다. 함장을 대좌로 2계급 특진시킨 데 이어 영웅 칭호를 부여하고 환영 행사를 거하게 했다. 이 사건이 동해사령부의 지휘부에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2개의 한류와 2개의 난류가 교차하는 동해는 ‘잠수함의 천국’이었다. 난류와 한류가 상하로 교차하는 경계는 수상에서 잠수함을 탐지하려고 발사한 음파를 튕겨낸다. 그러면 수상에서는 음파가 마치 콘크리트 벽 같은 것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식된다. 동해의 깊은 바닷속에는 천연의 방음벽이 설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상한 음파가 탐지된다 해도 어선의 기관소리, 고래의 숨소리, 갑각류가 떼 지어 바닷속 바닥을 이동하는 소리가 어우러진 소음 속에 섞인 의미 없는 잡음에 지나지 않았다. 적국의 잠수함과 조우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탐지되지 않는 동해에는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의 잠수함까지 500대 이상이 제멋대로 활보했다. 여기서 얻은 북한 군부의 지나친 자신감이 바로 이후 동해에서 2번의 수중 작전의 실패로 이어지는 ‘성공의 덫’이 되리라고는 당시에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1996년과 1998년에 각기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과 유고급 잠수정이 동해에서 좌초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성공적인 귀환 직후 북한 군부는 귀환한 잠수정을 기차에 실어 서해로 이동시켰다. 영웅이 된 대좌는 근무지를 동해에서 서해로 옮겼다. 그가 서해로 간 것은 동해에서 성공한 기술을 서해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 북한군 지휘부의 조치였다. 이렇게 해서 1990년대 중반에 북한군 서해사령부의 4곳에 약 8대의 잠수함정이 배치되었다. 2000년대 초에는 서해 함대사령부가 있는 남포와 비파곶, 해주와 사곶 8전대 기지에 잠수함과 잠수정이 주둔한다. 거리상으로는 사곶 8전대 기지가 우리 쪽과 가장 가깝다.

이때부터 북한 해군의 서해에서의 전술은 매우 혁신적이고 대담한 양상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서해에서 수중작전과 전술을 연마하는 데 북한군 서해사령부는 매우 길고도 험난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영국 핵잠수함이 물러간 그 자리에 약 10년 후부터는 북한의 잠수정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워싱턴 무관의 스파이 사건

강릉 해안에 좌초한 북한 잠수함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뒤집힌 지 엿새가 지난 1996년 9월 24일. 다가올 국군의 날 행사를 축하하는 워싱턴 주한미대사관 무관부 주최의 리셉션이 열리는 워싱턴 D.C.의 포트 마이어 미 육군 장교클럽.

워싱턴에서 무관 생활을 하면서 미 정부에서 ‘캐묻는 장교(inquisitive officer)’로 불린 한국 해군의 정보장교 백동일 대령이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이날 백 대령은 그가 미국에 부임한 이래 세 번째로 한국계 미국인인 로버트 김을 만났다. 로버트 김, 한국명 김채곤은 ONI(Office of Naval Intelligence)로 불리는 미 해군성 정보국에서 정보를 분석하는 컴퓨터 전문가로 19년째 일하고 있었다. ONI는 그 전신인 미 해군 정보사령부(NIC: Naval Intelligence Command) 시절부터 세계 각처에서 수집한 첩보를 취합·분석하는 해군 정보기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백 대령은 주미 무관으로 부임한 다음 해인 1995년 11월에 처음으로 로버트 김을 만나 한국의 열악한 정보 수집 능력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은 바 있다. 이후 로버트 김은 조국을 돕는다는 생각에서 백 대령에게 우편으로 북한과 한반도 주변국에 대한 각종 군사 동향에 대한 분석 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백 대령의 표현대로 ‘독이 든 사과’였다. 이미 FBI는 두 사람의 만남과 우편, 전화까지 모조리 감시하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은 한국에서 출장을 온 해군 제독 일행과 내셔널 세라톤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FBI는 이들이 호텔에서 회동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미리 호텔에 CCTV까지 설치해놓았다. 드디어 무관부 리셉션 세 번째 회동에서 로버트 김은 한국 해군에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FBI에 연행되었다. 이후 간첩죄로 기소된 로버트 김은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백 대령은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미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가혹했다.

백 대령은 유능한 첩보원이었다. 그런 그가 미국 정부의 감시에 대한 경계마저 게을리하면서 체포 직전의 로버트 김과 접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엿새 전에 발생한 강릉의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가 한국에 제공하지 않는 중요 정보가 있을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9월 18일에 강릉의 해변으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나타나 한국 사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러나 다음 날에 워런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은 “남북한 당사자들이 더 이상의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당사자들은 우리가 남북대화나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추가적인 도발행동을 하지 않기를 촉구한다”며 한가한 소리를 했다. 미국은 이미 북한과 1994년에 체결한 제네바협정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때 백 대령은 미국의 북에 대한 유연한 접근 때문에 미국이 강릉에 침투한 잠수함에 대한 정보를 알고도 한국 정부에 제공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했다. 당시 한국 국방부는 원산 송전반도에 있는 북한 해군 잠수함기지에서 두 척의 상어급 잠수함이 출동했으나 한 척이 되돌아오지 않았고, 실종된 잠수함이 바로 강릉으로 침투한 잠수함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분명 이를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며, 잠수함의 이동경로에 대한 분석까지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떤 첩보도 한국 정부에 제공되지 않았다.

원산에서 출항하는 잠수함은 바로 수면 아래로 잠수하지 않고 부상한 채로 항구를 빠져나온 후에 잠수한다. 남쪽으로 이동 중에는 배터리가 방전되는 2~3일 안에 다시 충전해야 한다. 충전에 필요한 디젤 엔진의 가동을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떠올라야 한다. 수면 바로 밑까지 떠오른 잠수함이 디젤 엔진을 가동하면 방사열이 나오는데, 이때 미국의 군사위성이 잠수함을 포착하게 된다. 당연히 잠수함의 이동경로가 나온다. 그래서 미국 정부에 이에 관한 데이터가 있는지를 문의하는 백 대령의 전화가 로버트 김에게 갔고, 이를 FBI가 감청했다.

이와 함께 북한 잠수함의 수중 음향에 대한 특징과 북한 해군의 동향 등 백 대령이 알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았고, 미국 정부가 한국에 기밀로 지켜야 할 사항도 너무 많았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한국 해군이 북한의 수중전력에 취약한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대형 수상함 위주의 전력 증강에만 몰입한 것은 이와 같은 정보 부족에서 기인한 바가 너무나 컸다.

잠수함 충돌설

1996년에 일어난 세 개의 사건을 장황하게 소개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사건은 이제껏 어떤 언론도 추적하지 못했던 것을 처음 공개하는 것이다. 적어도 1990년대 후반은 동해와 서해에서 각기 조용한 ‘잠수함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이 사건들을 떠올린 것은 비 오는 날, 2013년 9월의 마지막 촛불시위에서 <천안함 프로젝트>를 관람하고서였다.

개봉관이 상영을 거부한 이 다큐멘타리 영화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름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발표에 차분하게 의문을 제기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좌초에 무게를 둔 논지보다 영화 말미에 정체불명의 잠수함과 천안함이 충돌했으리라는 새로운 가설이 제기된 점이 충격적이었다. 이건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항인데,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1996년의 세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이 사건들은 바닷속에 대한 소름 끼치는 신비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것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음산하면서도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어두운 바다에 대한 오랜 트라우마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그날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간의 생명에 적대적인 심연의 바닷속은 우리가 읽으려고 해도 읽히지 않는 무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비밀이 많다는 점은 우리 주변국이 군사적으로 이용하기도 쉽다는 점을 의미한다. 국제법에 제약받지 않고 자객들이 활개 칠 수 있는 곳이 바로 바닷속이다. 달에도 우주선을 보내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닷속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즉 우리의 직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천안함 사건에도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이 영화의 논지에 따르더라도 더 많은 의문과 혼란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는 게 당혹스럽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 발표는 단 한 차례밖에 없었다. 이후 일체의 검증 과정도 생략되었지만 지난 3년 동안 정부나 군사전문가들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세미나, 학술대회, 논문 발표를 한 적도 없다. 아마도 세간의 인식으로는 군사조직 내에서는 천안함 사건 이후 서해 방어를 위한 수없이 많은 연구와 전술토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없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면 왜 우리 사회의 안보전문가나 전략가들이 북한군의 새로운 수중 무기체계와 전술, 우리의 대응 방향에 대해 말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안보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마저 천안함 사건 이후 다 사라져버린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점이다.

분석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가운데 최근 서해에서는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서북해역의 최북단인 백령도에 새로운 미사일이 배치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군사적 실효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이상한 조치다. 연평도에는 이미 주민보다 해병대원이 많다. 어업 전진기지였던 이 섬들이 이제는 군사적 요충지로 변하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해 보인다. 정말 북한이 도발할 의도가 있다면 대규모 공격무기가 배치된 이 섬들을 우회하면 되고, 아니면 섬의 반대편에서 도발하면 공격무기들은 쓸모없게 되기 때문이다.

▲ 천안암의 진실을 찾는 천안함 프로젝트. 당국의 규제로 어디서도 볼 수 없다.     © 백승우 필름
3년 전에 천안함이 그랬던 것처럼 마치 큰 재앙을 일부러 당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무엇인가에 홀려서 우리의 핵심 전력이 최전방 접적수역에 밀집해가고 있다. 천안함이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기동을 했더라면, 설령 북한이 잠수함으로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더라도 좌초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섬을 지키기 위해 위력적인 공격무기를 최전방에 배치하기만 하면 해결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과는 언제나 그 반대였다. 첨단무기는 본래 후방에 배치해놓고 위급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최전방에 배치해 북한의 타격거리에 노출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일련의 현상이 서해에서 우리의 상식과 직관을 벗어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은 1996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천안함 프로젝트>에서 암시하는 검증되지 않은 ‘잠수함 충돌설’은 어쩌면 1996년의 영국 잠수함 좌초 사건처럼 이스라엘이나 그 밖의 국적불명의 잠수함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이 가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믿지도 않지만, 이 영화는 묘하게도 자꾸 그런 가설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글쓴이는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입니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13년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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