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에 부끄러운 이름을 내밀고 글을 걸어 둔지 40여일이 지났다. 과분한 격려도 받았고, 심한 질책과 악의적인 비난도 있었다. 모두 다 마땅히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한다. 우연한 기회에 글을 쓰기로 작정하면서 그래도 지키고 싶은 원칙 혹은 소신들을 곰곰이 생각하였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시류에 영합하는 글쓰기는 하지 않겠다. 모르는 것을 아는체하며 글을 치장하지 않겠다. 내가 하는 말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열린 마음으로 독자들의 따끔한 질책을 늘 겸손하게 듣겠다. 얼마나 이런 나름의 소신에 충실했는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굳이 내 심정을 밝히자면 많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불혹(不惑)
백조는
일생에 두 번 다리를 꺾는다
부화할 때와 죽을 때,
비로소 무릎을 꿇는다
나는
너무 자주 무릎 꿇지는 않았는가
- 이산하 - 지난겨울 어느 날 나는 이 시를 읽었다. 충격이었다. 나는 살면서 참 많이 그리고 자주 무릎 꿇으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랬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릎 꿇으며 거기에 변명까지 해대며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도무지 생각하려 해도 그렇게 살지 않은,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날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토록 부끄러운 사람이 세상의 담벼락 한 귀퉁이에 문패까지 버젓이 달고 논객 행세를 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 세상은 어떤가? 나는 아파트 15층에 산다. 어떤 분처럼 넓은 평수 몇 개층을 오르락 거리며 살지는 못해도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살기에는 충분한 공간이다. 비록 아래층들이 내가 뒹구는 방바닥을 떠 받쳐주는 고마움 덕이기는 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 하늘에 떠서 산다. 이 말은 사실이다. 베렌다에 나가 밖을 보면 멀리로는 강물의 푸른빛이 생선의 비늘같이 반짝이고 고개를 조금 돌리면 네모난 논들이 바둑판 같이 금 그어져 있다. 나는 그 바둑판을 보고 혼자서 오목을 두기도 하고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 꽁무니를 쫓으며 거기에 탄 사람의 일상을 내 멋대로 상상한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 떠있는 까닭으로 내 시선 닿는 곳의 사람들의 수호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절대 내가 나타나기 전에는 나의 존재를 모를 거야 하며 신나게 날라 다닌다.
밤이 되면 나의 비행은 더욱 근사해진다. 강 건너 마천루(내게는 그렇다)의 윤곽을 따라 반짝이는 네온불빛은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세상시름을 잊게 해준다. 조금 더 멀리 날아가면 조정래의 ‘아리랑’이 들려오는 ‘징게 맹게 너른들’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 대목에서 내가 사는 곳의 지명을 벌써 머리에 떠올리며 내 비행의 궤적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쫓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황국신민은 죽어도 싫다고 만주로 북간도로 떠나 간 그들의 후손이 여전히 살아가는, 떠나가신 할배가 구천에서 조선일보를 보며 왜 울고 계신지는 몰라도 이 밤은 아름답고 나의 비행은 황홀하다.
이 아름다운 밤에 나는 눈까지 내리게 하여 그림을 그린다. 꽤나 오래된 시절에 성탄절이 다가오면 우리는 손수 카드를 그리고 그 카드를 우체통에 넣거나 남는 그림은 반강제적으로 친구들에게 팔면서 세밑의 축제에 쓸 자금을 마련하곤 했다. 단순하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들, 검은 물감으로 켄트지를 칠하고 그 위에 작고 예쁜 예배당과 십자가를 그렸다. 하얀 물감으로 지붕에 눈을 덮고 조그만 신작로를 그려 넣으면 끝이다. 조금 더 정성을 들이면 주인 모를 발자국 몇 개, 그리고 헌 칫솔에 하얀 물감을 묻혀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아까의 그림에다 대고 훑어주면 그림 속 세상은 금새 소담스런 눈이 함박 내린다. 방금이라도 산타할배가 루돌프가 끄는 썰매를 타고 올 것만 같다. 그 아름다운 소망을 카드에 담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던 밤...
세상은 빛이 있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 그렇기만 한가? 때로는 감춰져 있고 보이지 않아서 아름답기도 하다. 안개에 휩싸인 아침은 비행기는 못 떠도 내 눈에는 아름답다. 그 사이를 뚫고 나오는 빛살의 날카로움은 아직은 무섭지 않다. 안개가 걷히고 어둠의 보자기에 폭 싸여있던 세상의 윤곽들이 드러내는 인상은 결코 부드럽지만은 않다. 야트막한 동산을 뒤로 하고 멋스럽게 앉아 있던 농가는 아침이 되면 지저분한 창고로 변한다. 찢어진 비닐을 감고 있는 하우스의 살대와 녹슬어 있는 고장난 농기계며 버려진 냉장고... 밤에 내가 지나쳤던 푸근한 그 집이 아니다. 바디라인을 드러내며 반짝이던 마천루의 옥상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고 군데군데 썪은 물이 검푸른 빛으로 고여 있다.
이게 세상이다. 추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나 껍데기는 똑같다. 그것을 아름답게 보기 위하여 예술은 죽는 그 날까지 투병중이고 철학은 신음하면서도 꼿꼿한 정신을 놓지 않는다. 시대의 담론은 그 추한 것을 걷어내자고 목청을 돋구고 역사는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추한 것을 기록한다. 이것이 세상이다. 사물의 윤곽을 더듬는 시선이 따스한 것일 때, 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는 그만큼 행복하다.
{IMAGE1_LEFT}그렇다면 알맹이도 똑같은 것인가? 즉 본질 역시 마찬가지인가? 그렇지 않기에 세상이 고통스럽고 세상살이가 부대끼는 것이다. 위와 마찬가지로 그 아름다움과 휘황한 광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예술은 죽어가고 있다거나 문학의 위기라거나 말해진다. 철학이 껍데기를 벗자며 그 속을 파고 또 파야하는 것은 전체의 성질을 가진 마지막 원소, 즉 분자를 찿아 내지 못하고는 스스로 양파 같은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면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껍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본질을 이루는 경우가 더욱 많다. 이것이 세상살이의 힘겨움이며 까뮈(A.Camus)식으로 말하면 부조리(不條理)다. 이것이 세상의 본질이다.
완당 김정희의 '세한도'
- 선택은, 가치는 또한 효용이란? 이런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산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실존의 문제만큼은 선택일 수 없다. 이것이 또한 세상을 사는 딜레마다. 즉 우리가 언제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는가? 그리고 어떤 시기를 택하여 어떤 방법으로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내 선택의 바깥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 홀연히 던져진 존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명제가 철학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경우, 실존을 넘기 위해 혹자는 용감하게 자실을 감행한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 당시 그 당사자의 선택은 어떤 것인지 들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거기에 대한 어떤 결론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무튼 우리는 태어나면서 매일매일 선택을 한다. 무슨 음식을 먹을까? 어떤 옷을 입을까? 장차 직업으로는 무엇을 택할까?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살까?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한날 한시도 살아있을 수 없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곧 선택을 하는 행위의 반복적 일상이고 그 선택을 위해서 앞 장에서 말한 윤곽을 더듬고 본질을 살피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 말은 세상을 잘살기 위해서는 바로 (윤곽을) 더듬고 (본질을) 살피는 것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본질을 위장한 혹세의 선전으로부터 올바른 판단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로 가치라는 것을 가지고 기준을 삼는다. 이 가치가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저 가치가 모든 면에서 우월한가? 혹은 적합성의 측면에서 더 적합한가? 하는 기준을 두고 선택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적합하고 올바른 것을 우리는 가치중립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꼭 이 정의가 옳지 않더라도 균형을 갖추고 있다는 말에는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배고픈 거지에게 가치 있는 것은 한조각의 빵이나 햄버거에 물린 배부른 아이에게는 콜라의 톡 쏘는 맛이 절실하다. 가치란 이처럼 이율배반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치의 정의를 내리는 데 있어서는, 그것이 한 개인에게 던져진 말이 아니고 사회적 언어로 기능할 때, 그 가치를 선이다 악이다 주장하기에 앞서 항시 고민하고 솔직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거나 그렇게 하려는 노력도 없이 제멋대로 퍼질러 대는 뭣 같은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게 또한 세상이다.
이율배반의 가치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이 말해보면 진짜가치(사용가치)와 가짜가치(교환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없으면 우리가 한시도 살 수 없는 공기는 진짜가치다. 화장지보다 그 기능이 쓸모가 없는 만원짜리 지폐는 없어서 못 줍는 것이지 땅바닥에 있기만 하다면 우리 모두는 온종일을 그 짓해도 허리 하나 아프지 않을 것이다. 공기는 가짜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단 돈 일원의 가치도 없다. 실상은 진짜가치(사용가치)가 더 소중하고 필수불가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짜가치가 지배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살이의 힘겨움은 바로 이런 가치의 불일치가 주는, 경제적 인간 사회적 인간으로서 부여 받은 숙명 같은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경제에 자유로워질수록 예술이니 문학이니 문화(고급과 편리라는 측면의)니 하는 것에 대하여 아는 척을 해야 속이 편하다. 은연중 자신이 가짜인 것을 알고 있음으로.... 그 대표적인 가짜인식집단이 나를 포함한 지식인 행세에 열중하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선택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래서 우리는 이제 효용(效用)을 따지게 된다. 똑같은 양의 투입(input)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최대의 결과(output)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곧 효용의 문제다. 이것이 경제의 근본원리다. 최소비용의 최대효과에서 경제는 태어나고 그 경제를 영위하는 우리들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 밤낮으로 살기가 버겁다. 어디 경제뿐이겠는가? 가치와 효용은 우리들의 모든 삶을 간섭하고 규정한다. 어떤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나는 상상으로도 가져보지 못한 그 엄청난 돈을 제 주머니에 몰래 쑤셔 넣지 않을 가능성, 즉 효용에서 우월한 인간을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선거다. 만원을 가지고 소주 한 잔하며 울분을 달랠 것인가? 참고 얘들 장난감 하나 사가지고 집에 가서 좋아라 하는 아들의 얼굴을 볼 것인가? 나는 오늘도 고민한다.
- 그렇지 못한 세상은 그래서 불행하다‘세상’에서 내다본 세상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양파 속 같기만 하다.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매양 똑같은 속이 나오는 양파 같은 세상에 나는 산다. 이 말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중심이 철저히 위장되어 있고 교묘한 배합으로 실체를 숨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또한 양파처럼 그 속의 본질이 분명한데 무작정 아니라고 우기는 이중인격자가 판치는 세상이란 말이기도 하다. 조선일보를 예로 들어 보자. 그들은 분명 친일과 찬독재, 언론이 걸어야할 정도를 벗어난 반인권적인 작태를 서슴없이 휘두르며 세상의 중심에 자신들의 성을 쌓았다. 그들은 이제 그 성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지배하려들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조선일보를 부정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비록 사회적 역기능 혹은 부정한 작용을 하면서 성장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분명 이 역사를 담당하여 왔다. 우리가 그 조선을 절독해야 하고 안티조선을 부르짖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역사의 담당자가 아니라는 부정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도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대사를 들여다보면 역사의 전면에서 선구(先驅)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 대부분이 바로 친일의 괴수들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반성하고 역사의 교훈으로서 다시는 그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인촌 김성수가 친일하였다 하여 우리 민족 최고의 사학 고려대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담론은 그들의 반역사적 반민족적 행적보다는 이제라도 그들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거듭 다시 태어나 언론의 정도를 걸어달라는 것이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수구의 미망에서 깨어나 역사진전의 발걸음에 힘을 보탬으로 해서 자신들의 죄악을 용서 받으라는 것이다.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한나라당에 심하게는 적대적인 것은 그곳에 아직 자신의 죄악을 반성하거나 시인하지 않고 역사를 또 한 번 농단하고자 암약하는 수구진골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민주당 편을 들기도 싫은 것은 더럽고 추악한 이 지경의 부패를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다. 다들 자신들만이 옳다는 그 가증스러움과 뻔뻔함을 나는 더 이상 참아내기 힘들다.
내가 노무현을 사랑하면서도 YS의 시계를 찬 노무현이 달갑지 않았던 까닭은 YS가 반성하기는커녕, 제철 만난 과일장수처럼 연신 이 아줌마 저 새댁 붙들고 떠드는 그 꼬락서니가 보기 싫은 것이다. 홍걸의 교과서 김현철은 마산으로 갈까? 아니 부산 출마를 저울질한다는 그 기가 막힌 소식을 내가 사는 세상에서 들어야 한다.
세상을 온통 도적질 난장판으로 만든 것은 정치인만이 아니다. 권력의 충실한 시녀 검찰은 그렇다 치고 이 땅의 사법부는 어떤 정의를 심어주었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범죄자일수록 (돈없고 빽없는 우리 서민들 빼고) 그 수형기간은 참으로 짧았다. 더도 말고 우리 같은 서민들과 똑같은 법률의 형평과 그 댓가를 물어주기를 소망한다. 지나간 세월에는 출세를 위하여 어쩔 수 없었다 하여도 제발 이번만큼은 신분의 고하나 다른 조건들로 인하여 법의 처벌에서까지 차별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돈없는 서민이 벌금을 못 내서 수형생활을 해야할 때, 하루의 노역으로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채 삼만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제발 대통령의 아들이고 최규선이고 모든 게이트의 주인공들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서 드러난 액수의 십만분의 일만큼의 시간만 반성할 수 있도록 법의 지배를 확립하여 주기 바란다. 그래도 살아생전에 교도소 담 밖을 거의 모두 보지 못할 것이다. 가혹하다 말할지 모르겠다. 우리들 서민이 절망하는 심사에 비추면 절대 가혹하다 말하지 못한다.
- ‘세상’에서 내다본 세상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고 노력하여도 가치와 효용, 즉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없는 이 세상은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서두에서 말했듯이 글을 쓴다는 것이 내게는 어렵고 고통스런 작업이다. 특히나 아직 진실이란 혹은 본질이란 문제에 접근하지 못한 짧은 나의 인식으로 인하여 이름을 걸고 어떤 현상에 대하여 감히 말해온 나는 서툰 글쟁이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우매하고, 세상을 바로보고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지는 못하였으나 잠시라도 그 시선을 거두지 않기 위해 성심을 다했다는 변명을 하면서 내 글에 관하여 몇자 적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글을 쓰면서 적어도 내 글이 옳고 그름을 떠나 세상에 걸림으로서 이 세상의 한구석에 묻히고 감추어진 진실들을 비춰보려 애썼다. 최소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보다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여지들을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비난을 받으며 때로는 잘 난체를 한다는 곡해를 당하며 글을 썼다. 나는 이런 모든 평가에 대하여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나 답답한 감정의 조각들은 숨길 수 없어 밝혀야겠다.
내가
공희준의 글을 비판하자 몇몇 분께서 나를 질타해 주셨다. 그분들에게 아니 이것은 공희준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주장을 함은 모든 사람들의 자유다. 그러나 그 주장이 근거 없는 단정이나 어울리지(잘 모르는) 않는 삽화를 끼워 넣어 비논리적인 글을 감추고 있을 때, 그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사실 나는 공희준의 반론을 기다렸다. 대자보에 오기 전 내가 비판한 또 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반론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글을 올리기 전 여러 번을 정독하며 나의 무지와 유치를 찿기에 열중한다. 그런 노력은 최소한 글 쓰는 이의 양심의 문제다. 대자보가 문학적 상상력, 즉 허구를 소재 삼아 세상을 드러내는 문학공간이라면 나는 오늘부터 나의 모든 감성적 언어와 직조의 기술을 동원하여 하루도 안 거르고 써 올릴 각오가 되어 있다.
[관련기사]임흥재, 노무현과 히딩크, 그리고 텍스트- 텍스트를 통해 드러나는 공희준 글의 기만성, 대자보 85호{IMAGE2_RIGHT}새삼 이 문제를 끄집어 낸 것은 배정원님이 지적하고 있는
임권택의 깐느 수상에 대한 그의 글이 풍기는 혐의와 부정한 냄새다. 그가 한국의 영화제작의 현실과 문제점을 얼마나 많이 알고 또 그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해결을 위해 절치부심하는 지는 나는 모른다. 그토록 이 땅의 영화제작현장이 열악하고 자라는 신진 영화인들에게는 높은 벽이라면 그 문제만을 문제 삼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깐느는 뭐고 작가주의는 웬말인가? 배정원님이 지적했음으로 구체적인 비판은 그만 두기로 하자.
내가 그의 글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활자의 생산이다. 알맹이도 없는 것을 가지고 혹 하고 시선을 붙잡기 좋은 글자를 늘어놓음으로서 글을 짜는 그의 놀라운 재주를 나는 인정 안할 수가 없다. 어떤 분이 말했듯이 내가 콤플렉스가 있다면 그 놀라운 활자의 조합술이다. 또 어떤 분은 ‘현학적’인 글 운운하신다. 그 분의 눈높이에 맞추어 나 또한 함부로 말한다. 웃기는 짜장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다. ‘현학’이란 낱말의 의미와 그 속에 담긴 촌철살인의 기지와 해학을 당신은 알고나 있는 것인가? 알려고 노력이나 했는가? 했다면 그대가 현학이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독서와 경험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그 현학적 글쓰기에 합당한 글을 쓰는 거장을 고금과 당대를 통털어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서경덕 황진이에게서나 겨우 조금 보이는 그 현학을 그대가 알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내가 그를 미워하거나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함부로 단정하고 책임지지 않는 그의 비겁함이다. 반론하시라. 또한 기대한다. 지방선거가 끝나기 전에 물어야겠다. 그대가 노사모에서 노래한 대로 세상이 룰루랄라 되는 것인가? 지극히 부분적인 것이지만 물어보아야겠다. 덕수궁터에 미대사관 지워 줄려고 관계법령이 개정되었는가? 나는 이번 계제에 다른 이유를 들어 ‘개정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는 건교부 담당자의 말밖에는 들은 것이 없어 묻는 것이다. 그대가 이 곳에 올린 <
[국민이 SK할 때까지] 중에 공희준은 분명 개정이 되었다고 못 박았다. 이것은 아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공희준에게는 중요하다. 한 번쯤 자신의 글을 다시 검토하고 함부로 써대는 그 사실 아닌 것들로부터 정직해 지시라.
내가 제목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 글은 내가 대자보라는 곳에 걸어둔 ‘세상게시판’을 통해 내다본 나의 소회다. 때문에 또 공희준에게 아픈 상처를 주었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구실 삼아 마타도어나 매카시연 한 것이라 나를 욕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대자보에 내다건 ‘세상’을 내려야 한다. 그것도 지금 곰곰이 생각 중이다. 나의 불민함과 여러 부족한 식견으로 인해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그 세상을 사랑하고 조금 더 찬찬히 세상을 향하여 바라볼 참이다.
- 불혹의 나이에 올해로 꼭 불혹의 나이다. 어찌된 일인지 내게는 여전히 온갖 혹한 것투성이니, 나이를 헛먹은 것 같다. 내가 예민하여 이미 눈치 채었으니 나를 비판하기 위해서 나이를 헛먹었다는 공박은 참아 주시기 바란다. 내가 부끄러운 것은 이미 고변하였지만 살면서 너무 자주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닌가 하는 창피함이다. 이런 저런 핑계로, 먹고 살기 위해서, 현실이 어쩔 수 없어서, 남들도 다 그러니 하며 온갖 속 보이는 언사들로 나를 합리화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섞여가며 살아온 세상, 그러고서 이렇게 글을 쓰고 누구를 공박하고 사회의 이단을 경계하는 꼴이려니... 그것이 안타까운 나의 자화상이다. 억지로 말하면 그런 나의 무릎을 곧추 세우기 위해서 나는 어쩌면 뻔히 아는 고달픈 이 작업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혹한 것이 없는 때가 되면 나의 이름은 이 곳이 아니라 내 자식이 일년에 한두 번쯤 찾아주는 잡풀 무성한 어느 묘지의 돌조각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