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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 ‘판옵티콘’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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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기사입력 2005-07-16

『감시와 처벌』

▲ Michel Foucault(1926∼1984)

1926년에 태어나 1984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첨단 정보기술의 발달로 ‘프라이버시의 쇠퇴’와 ‘감시의 융성’이라는 무서운 위협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빅 브라더’라는 말을 유행시킨 소설 『1984』의 저자인 조지 오웰의 후계자쯤 되는 인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푸코가 75년에 낸 『감시와 처벌』은 푸코가 갖고 있는 독특한 ‘권력’ 개념을 잘 보여준 책이다. 이 책에서 푸코는 “‘권력’을 일정한 양의 물리적 힘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살아있는 모든 유기체와 모든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해하였다. 즉,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여러 형태의 정치적ㆍ사회적ㆍ군사적 조직들뿐만 아니라 온갖 행위 유형들, 사유 습관들, 지식의 체계들 속에서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무형의 유동적 흐름이다.”

『감시와 처벌』은 절대왕정 체제하에서 자행되었던 무자비한 형벌의 현장을 자세히 묘사하는 걸로 시작하고 있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그 부분을 건너뛰고 읽는 게 좋을 것이나, 살아있는 사람의 육체를 죽어 있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다루듯이 다루었다고 보면 된다. 후자(後者)는 요리를 위한 것이지만 전자(前者)는 순전히 처벌을 위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엔 그런 잔인한 형벌이 사라진 걸까? 죄수를 인간적으로 대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다. 사람들이 잔인한 형벌을 받는 죄수에게 동정심을 갖게 되고 그에 따라 권력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에 잔인한 형벌 대신 ‘감시’ 또는 ‘규율’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푸코는 근대적 ‘감시’ 또는 ‘규율’의 기원을 ‘판옵티콘’에서 찾는다.

판옵티콘이란 무엇인가


 
▲  Jeremy Bentham  
(1748∼1832)
1) 벤담은 자신이 판옵티콘의 운영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1792년 수천 명의 죄수를 가둘 수 있는 판옵티콘을 영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한 이후 20년간 그 일의 성사를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영국 정부는 판옵티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옵티콘(Panopticon)은 ‘모두 본다’는 뜻으로,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을 가리킨다.1)
원래는 노동자들을 훈육하는 수단으로 공장에 설치하려고 자본가들이 고안한 장치였다는 주장도 있다.

어찌됐건 이 원형 감옥에서는 간수는 중앙에 있는 탑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 판옵티콘의 기본 개념은 감옥뿐만 아니라 공장, 학교, 군막사, 병원, 정신병 요양소 등에도 적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사회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는 기본적인 사회적 디자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푸코는 바로 판옵티콘에서 ‘근대 권력의 전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박정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시의 시선은  보이는 듯할 필요는 있으되 확인될 필요는 없다. 시선은 확인되지 않을 때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판옵티콘이야말로 단순히 시선 하나로 가동되는 이상적인 권력 장치이다. 이때 시선은 앎과 직결된다. 죄수를 바라보는 감시인은 죄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지만 감시인을 바라보지 못하는 죄수는 감시인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시선의 불균형은 앎
2) ‘담론(談論)’이란 무엇인가? 조흡은 이렇게 설명한다.

“지식과 말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 말이라는 것도 철저하게 힘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힘깨나 쓰는 사람의 말이 힘없는 사람의 말보다 무게가 있을 것이라는 것도 상식적인 얘기다.

이렇게 힘(파워)이 실린 말을 영어로는 ‘디스코스(discourse)’라고 하고 한자어로는 ‘담론(談論)’이라고 주로 번역해 사용하는데, 담론이라는 단어에는 힘이란 개념이 내포되지 않아 부적합한 일본어식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디스코스는 ‘힘을 실은 말’이라고 번역했을 때에 원래의 의미가 살아난다. ……

푸코는 디스코스, 즉 세상에 떠도는 모든 힘있는 말들은 절대로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말의 생산(또는 억압)은 어느 특정한 사회 조건에서 항상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디스코스는 항상 누구의 말이 옳은지를 겨루는 싸움터라는 얘기다.”

조흡, <힘, 몸, 그리고 성: 미셸 푸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인물과 사상 4』(개마고원, 1997), 324∼326쪽.
의 불균형을 낳고, 앎의 불균형은 권력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앎은 담론이 되어 사람들을 억압하는 교묘한 수단이 된다.”2)

‘감시의 공간화’가 서양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다. 사실 그건 푸코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감지(感知)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푸코의 경우 그러한 ‘시선’과 관련하여 고대와 근대를 비교하면서 그걸 자신의 ‘권력 이론’으로 연결시켰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푸코는 판옵티콘이 사회 전반의 통제와 규율의 원리로 확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수퍼판옵티콘이란 무엇인가

최근 거론되고 있는 건 전자 판옵티콘이다. 각종 전자감시 기술은 프라이버시에 근본적인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다. ‘감시’는 거대한 성장산업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2003년 7월 ‘노동자감시 근절을 위한 연대모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 전체 사업장의 90%가 한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노동자 감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4시간 감시에 숨이 막힌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공무원들의 근무 태만을 감시하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감지기를 부착시켜 놓고 인공위성 추적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전자감시 기술은 인간의 신체 속에까지 파고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어린아이의 몸에 감시 장치를 내장하면 아이의 안전을 염려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또 그 기술이 다른 좋지 않은 목적에 사용될 위험은 없는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감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전자기술에 의한 정보의 집적은 언제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위협할 수 있다. 마크 포스터는 소비자 데이터베이스를 ‘수퍼판옵티콘(superpanopticon)’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의 특성은 “감시를 당하는 사람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홍성욱은 ‘수퍼판옵티콘’은 가상 세상을 통한 판옵티콘의 권능 강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상 판옵티콘(virtual panopticon)’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시놉티콘이란 무엇인가

홍성욱은 벤담의 판옵티콘과 전자 판옵티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도 존재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자 감시의 경우에 종종 역(逆) 감시가 가능하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노르웨이의 범죄학자 매티슨은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하는 언론의 발달을 시놉티콘(Synopticon)으로 명명하였는데, 이는 권력자와 대중이 동시에(syn) 서로를 보는 메커니즘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성욱은 시놉티콘은 인터넷과 같은 다 대 다(多 對 多, many-to-many)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역감시로 진화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랩탑과 모뎀을 사용해서 다른 해방군 조직에 명령을 전달’할 정도로 첨단 기술을 적절하게 사용했다고 알려진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군의 해방운동(1994년)에서도 우리는 역감시의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당시 멕시코 정부의 유혈진압에 반대하고 반군의 이념을 지지하던 세계 각국의 진보적인 그룹들 역시 인터넷에 네트워크를 만들고 멕시코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이 네트워크는 농촌을 거점으로 한 사파티스타 반군, 이들을 지지하는 멕시코시티의 반정부 대학생들, 이를 지원하는 전 세계의 다양한 그룹과 개인의 세력을 결집해서 정보를 교환하고 여론을 형성했으며, 멕시코 정부가 강경 진압하기 어렵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후 이 네트워크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반대하는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저항 네트워크는, 정보통신기술이라는 파놉티콘을 권력자를 견제하는 ‘역파놉티콘(reverse panopticon)’으로 탈바꿈시켰다.”

꼭 인터넷이 아니라 하더라도, 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한 시민이 로드니 킹 구타 장면을 찍었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경찰의 대화를 녹화한 것도 시놉티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이택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과적으로 푸코의 논리는 테크놀로지에 내재한 변증법적 속성을 오직 ‘감시’의 문제로만 파악하는 정태적 태도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자체는 ‘판옵티콘’인 동시에 ‘시놉티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착취인 동시에 해방이기도 한 것처럼, 테크놀로지도 이중성을 갖는 것이다.”

‘탈판옵티시즘’과 ‘통치적 합리성’

오늘날 판옵티콘이라는 개념의 은유는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학자 로이 보인은 사회적 질서가 감시에서 유혹(seduction)으로 옮아갔으며, 판옵티콘이라는 외형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었고, 감시보다는 대비와 예방에 주력하고 있으며, 쌍방향 감시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이젠 ‘탈판옵티시즘(post-Panopticism)’의 상황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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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도 이 주장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 감시의 ‘두 얼굴’에 주목한다. 그는 푸코도 『감시와 처벌』을 출간한 이후 ‘통치적 합리성’(governmental rationality 또는 governmentality)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민했다는 걸 거론하면서 “여기에는 권력이란 감시하고 규율을 강제하는 것처럼 우리를 속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생산적일 수도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19세기를 통해 정부가 국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계적으로 처리한 것은 국민에 대한 관료제의 통제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복지국가와 공민권에 대한 보호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개개인의 권리를 신장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 작업장이나 기업 조직에 대한 감시는 노동자나 직원을 통제하는 기능 외에도 작업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 ‘현대사회=감옥’이라는 등식은 현대사회와 조직에서의 통제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홍성욱은 역감시 또는 시놉티콘의 만연은 사람들에게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감시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내성이 생기게도 하며, 프라이버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세대 차이가 존재하는 것도 프라이버시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21세기를 사는 젊은 세대들은 한두 세대 이전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1960∼1970년대 미국에서 개발된 화상전화는 기술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전화를 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한다는 이유 때문에 실패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화상 채팅에 열중하고 있다. 웹캠으로 찍은 사진이나 스티커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친구할 사람을 찾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실명으로 올리는 사랑 고백터도 인기이고, 자신의 사진은 물론 자세한 신상정보가 올라가 있는 홈페이지, 인터넷 상에서 공개 일기를 쓰는 일, 웹캠으로 자신의 작업은 물론 집에서의 사생활도 공개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프라이버시의 종언’인가

전자감시 기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프라이버시를 위협할 것이다. 그래서 아예 ‘프라이버시의 종언’을 선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지적된 바와 같이 스스로 프라이버시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캘빈 고틀립은 프라이버시가 “그 시대가 도래했다가 가버린” 개념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대하는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 프라이버시에 가치를 둘 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다. …… 프라이버시를 희생시켜 얻은 보상이 지금은 너무 흔해져서 모든 실용적인 목적에 더 이상 프라이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프라이버시가 뭐 그렇게 중요해? 혹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프라이버시는 인권의 문제인 동시에 대단히 실용적인 효용도 갖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좋겠다. 프라이버시 보호는 민주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자신들에 관한 정보를 통제할 수 없게 된 개개인은 결국 소극적으로 된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서 자신은 이미 그 일부가 아니라고, 즉 자신들은 그 세계의 목격자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정책결정자가 말하는 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창조적, 생산적 시민이기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또 현실적으로 프라이버시권이 표현의 자유에 상당한 제약이 되고 있기는 하나 좀더 깊이 그리고 멀리 생각하고 내다 볼 때에 둘이 꼭 상충된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법학자 로드니 스몰라가 지적하였듯이, “사적인 공간이나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생활은 창조적이고 통찰력 있는 표현이 나올 가능성이 없는 생활”이므로 “프라이버시는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뭔가를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표현적인 면을” 계발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현실적인 힘의 관계를 보자면, 시놉티콘은 여전히 가능성이거나 극소수의 시도일 뿐 현실은 압도적인 판옵티콘 우위로 가고 있다. 감시와 프라이버시 문제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전자 판옵티콘은 인류에게 던져진 새로운 고민거리임에 틀림없다.
 

  참고문헌

Ω박정자, <역자 후기>, 리디아 앨릭스 필링햄 지음, 모슈 슈서 그림, 박정자 옮김, 『미셸 푸코:   만화로 읽는 삶과 철학』(국제, 1995), 174쪽.

Ω박홍규 역, 『감시와 처벌』(강원대출판부, 1989).

Ω염규호, <미국에서의 프라이버시 침해와 언론의 자유: 판례를 중심으로>, 『언론중재』, 통권   53호(1994년 겨울), 54쪽.

Ω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나남, 1994).

Ω이택광,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문화는 어떻게 현실에서 도망가는가』(이후, 2002),   129쪽.

Ω허유신, <24시간 감시 숨이 막힌다>, 『경향신문』, 2003년 8월 1일, 19면.

Ω홍성욱, 『네트워크 혁명, 그 열림과 닫힘: 지식기반사회의 비판과 대안』(들녘, 2002), 204∼   205쪽.

Ω홍성욱,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책세상, 2002), 34, 100∼102, 126∼127, 133∼   134쪽.

Ω닉 다이어-위데포드, 신승철ㆍ이현 옮김, 『사이버-맑스: 첨단기술 자본주의에서의 투쟁주기   와 투쟁순환』(이후, 2003), 221∼222, 259∼260쪽.

Ω렉 휘태커, 이명균ㆍ노명현 옮김, 『개인의 죽음: 이제 더 이상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생각의나무, 2001), 244쪽.

Ω로버트 베레어의 말, 제프리 로스페더(Jeffrey Rothfeder), 김희숙 옮김, 『개인정보가 팔리고   있다: 첨단 컴퓨터사회의 함정』(한마음사, 1994), 40쪽.

Ω스탠 데이비스, 김승욱 옮김, 『미래의 지배』(경영정신, 2002), 94∼95쪽.

Ω제임스 밀러, 김부용 옮김, 『미셸 푸꼬의 수난 1』(인간사랑, 1995), 26∼27쪽.


 

* 본문은 『대중문화의 겉과 속 Ⅱ』(인물과사상사, 2003년 10월)에 발표된 것으로 웹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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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찬 05/07/18 [10:36]
강준만교수에 대한 린치와 테러가 발발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을 염려
하는 분도 계신 참담한 정국 입니다. 모 게시판 등록일: 2005.07.17. 조회수 ?6 글쓴이:
이정철씨의 기사에 의하면 "천하의 강골 이영희선생도 노무현 양아치패거리들의 린치와 협박
에 견디다 못해 친노성 발언을 한마디 해주고선 풀려 났으니, 패악한 양#치패거리들에게
일개인으로서 맞서는 것은 자칫 물리적 생존권 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기에
노무현정권에 반응하는 기사를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글도 있습니다. 

인터넷 특성상 다소의 과장법도 문맥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유무선을 막론하고 불법
적인 도감청에 감시와 미행, 타당성도 없는 법으로 신변을 강제하고 주변에 대한 흑색선
전 살포로" 등등의 까지를 나열한 기사를 보면 사뭇 모골이 송연하고 쉬운 말로 머리카락
이 쭈삣 섭니다. 자랑해야할 내 조국 한국 땅덩어리에 조지오웰의 소설 '1984'의 감시와
테러가 되살아 날지도 모를 악몽을 꾸는듯하여 답답하고 갑갑하기는 정도와 한계를 넘어
선지 오래입니다. 

지금 전체 게시판을 통틀어 풍성한 논란과 정치적 화재가 되고 있는 강준만교수의 강원일
보 칼럼 '승자의 재앙'이라는 한 단면을 적절하게 제시하는 멋진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출처: 진보누리 (2005-07-16 23:55:17) 
이름 : 배고픈 사람 
제목 : 한국형 마키아벨리즘 

권력은 권력으로 하는 모든 것을 '정의와 선'으로 만든다. 그 행위가 폭력에 기반한 것일 때 누구나 독재와 파쇼를 말하며 반발심과 저항심을 갖지만, 그 행위가 교묘히 숨겨진 선동과 기만술에 그럴싸한 명분을 갖춘 경우 오히려 그 교활한 권력의 본색을 들추어내려는 비판반대 세력은 끝간 데를 모를 정도로 매장당하고 추락하고 만다. 

마키아벨리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무서운 점은 교활함이다. 권모술수, 기만, 위장술이다. 그러한 권력의 지배하에 놓인 국민들은 원인도 모르고, 왜 그런지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고 그냥 힘들고, 좌절하고, 절망속에 살아간다. 무엇인가 분노와 저항의 대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니 자조속에 한숨과 푸념으로 일관하면서 권력과 권력에 공생하는 세력들이 저지르고 있는 지독한 교활함에 천천히 살이 뜯기고, 뼈가 갈리며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권력은 헌법에서 정한대로라면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권력은 국민을 가지고 노는 세력으로보터 나온다. 따라서 한국의 실질적인 국가기관은 그들이다. 그들은 과거 수십년간 누적해온 '민주화'라는 정당성과 명분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무한정의 권력을 만들어 내고 행사하며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들은 아직도 비판반대 새력으로부터,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수구 세력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있다는 지극히 교활한 기만술을 펼치며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폭력으로 짓누를수 있음에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담보물로 그들을 아주 잘 '관리'하고 있다.

'악'이 있어야 '선'이 빛나고, '부당함과 불의'가 있어야 '정의'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즘의 또 하나 빛나는 전술이다. 과거에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 투쟁에서 쌓아온 '민주화'란 간판은 현재 자신들의 교활함과 기만술을 드러내려는 비판반대 세력들이 절대로 과거와 단절되거나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냥 영원한 적이어야 한다. 연관성이 있건 없건 그들을 비판반대하면 이유불문 과거의 기득권 수구세력으로 몰아야 한다. 반민주 독재 세력으로 구덩이에 밀어넣어야 한다. 반민족 사대주의의 똥통에 쳐박아야 한다. 

적어도 그들이 한국의 법적 권력기관은 물론이고, 보이지는 않지만 법위에 군림하는 실질적인 권력기관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는 말은 그저 고어에 불과할 것이다. 장기집권을 말하지 않으면서 장기집권을 위해 빈틈없이 분위기를 몰아가는 그 놀라운 솜씨, 독재의 티를 절대로 내지도 않으면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해내는 황당무게하기까지 한 재주들에 그들의 반대쪽에 선 한 보잘것 없는 인간으로서 무력감은 제쳐놓고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정권 그들은 역사를 만들고 있다. 기만의 역사, 교활함의 역사, 한국형 마키아벨리즘의 역사를.....


위저자가 '배고픈 사람'이라고 표기 되어 있는데 정작 멋진 글은 다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서 나오는 이 서글픈 현실 앞에 등따숩고 배부른 이의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테러와 감시랄 것까지는 없으나 제 주변의 신상에도 의혹 제기가 가능한 이상현상은 감지되
고 있습니다. '승자의 재앙'으로 야기될 수도 있는 강교수에 대한 신변안전에 대한 관심과
격려를 소망 올리며 또 노무현 비판자들 각자 주변의 신상안전도 챙기시어 혹시모를 불행에
대비하시길 염원합니다. 아울러 날도 더운데 분노의 감정이 폭발 하거덜랑 아이스케키라도
드시고 쉬어가면서 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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