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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나믹 코리아에서 쇼비니즘 코리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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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기사입력 2004-11-01

1. 쓸데없는 소리들
 
몇 가지 제목을 만들어 놓고 생각을 하는 건 내 취미 생활 중의 하나이다. 요즘 사람들이 얘기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민했던 것은 92~94년도의 일이다. sustainable development의 원형이었던 durable growth나 eco-development에 대해서 수식적인 방식으로 이해해보려고 하던 것도 그 시절이다.
 
요즘에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말을 정부에서 쓰면 성장률이 자꾸 떨어지니까 어떻게 하면 소위 ‘잠재성장률’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느냐는 말을 정부와 언론이 쓰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하나는 sustainable development이고 또 다른 하나는 sustaining growth이다. development를 발전이 아니고 ‘개발’이라고 번역하는 것 자체가 새마을 운동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고, 후발개도국인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편의에 따라 그리고 맥락에 따라 똑같은 단어를 개발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발전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발전은 대개 국민경제와 관련해서 해석되고, 또한 human development와 social development를 포함한 개념이기도 하다. 최근에 내가 주목하고 있는 ‘인간 정주’, 즉 human settelement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다보니 재개발이라는, 그야말로 sehr koreanisch, 대단히 한국적인 말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재개발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한국 사람 안에 들어가 있는 탐욕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이 제대로 된 말인지 아닌지 챙겨보지 않았던 지식인의 나태를 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기 시작한다.
 
성장을 유지시킨다는 면에서 sustaining growth가 적정 성장률을 제어해서 생태적 조화를 유지한다는 sustainable development가 때때로 같은 단어로 번역된다는 것도 유사한 현상이다.
 
더 이상 나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해서 고민하지는 않는다. 이 개념을 생각을 끌어나가는 소위 key concept으로 쓰지 않은 것은 96년도의 일이다. 지평의 확장이라는 측면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함정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생각을 끌어나가는 개념으로서는 폐기한지 오래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의 목표 중의 하나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환경친화적 개발이라는, 그래서 ‘개발은 필요한 거 아니야?’라는 말에 일관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개념축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태주의라는 용어가 조금 더 사태를 풀기 위해서는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보다는 초록정치라는 용어가 조금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 말로 번역하는 경제학은 언제나 political economics, 정치경제학이었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지금도 정통경제학 수업은 political economics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균형성장론을 만든 솔로우의 수업 이름도 Political Economics이고 젊은 천재였던, 그래서 젊어서 노벨상을 받은 로머의 수업 이름도 역시 Political Economics이다.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는 상당히 강조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개념보다는 느낌을 더욱 중요시하고, 요즘은 영성 자체가 논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기능한다.
 
'몸', corps라는 말이 있다. body라는 이 말은 철학사적으로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을까? 간단하게 얘기하면 몸이라는 말은 ‘은밀한 혁명’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다. 소위 정신의 발현체인 이성이 아니라 또 다른 메카니즘을 가지고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할 때, 이 힘을 표현하는 용어가 통상적으로 몸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수학적 사유를 철학에 가지고 온 것으로 유명하고, 이성에 의한 성찰을 시작한 것으로, 그래서 cogito -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명제로 고전철학에 전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데카르트가 수학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때때로 인정할 때 ‘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몸을 철학의 차원으로까지 고양시킨 사람으로 대개 은밀한 철학을 얘기하면 늘 떠올리게 되는 메를로-뽕띠라는 아저씨다. 이성이 신에 의하여 주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가 데카르트에서 헤겔까지 내려오는 사변철학 즉 이성위주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메를로-뽕띠 계열의 은밀함을 인간의 말로 표현하면, 그런 거 말고도 있다는 얘기다.
 
지금은 몸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지만, 이성주의 철학자들이 들끓던 시기에, 몸은? 이런 질문은 그야말로 분서갱유를 당할 정도로 혁명적인 은밀함 속에서 조용히 전파되는 것이다. 피히테나 쉘링을 거쳐 헤겔까지 내려오는 자연철학적 속성을 그래서 메를로-뽕띠 계열의 사유로 해석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이다. 분명히 정신, Geistes와는 분리되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 것이고, 괴테가 자연사상이라고 해서 이 시점에 불쑥 철학사에 끼어들어오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 일련의 흐름을 완성시킨 헤겔도 분명히 깡패는 깡패다. 그야말로 몸은 자연 그 자체였다.
 
몸의 문제에 대해서 제일 먼저 고민한 사람은 버스에 치여 사망한 근대시의 길을 연 김수영이다. ‘설사의 알리바이’라는 66년도 시가 그걸 잘 보여준다.
 
설사의 알리바이
 
설파제를 먹어도 설사가 막히지 않는다
하룻동안 겨우 막히다가 다시 뒤가 들먹들먹한다
꾸루룩거리는 배에는 푸른 색도 흰 색도 敵이다
배가 모조리 설사를 하는 것은 머리가 설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性도 倫理도 약이
되지 않는 머리가 불을 토한다
여름이 끝난 壁 저쪽에 서있는 낯선 얼굴
가을이 설사를 하려고 약을 먹는다
性과 倫理의 약을 먹는다 꽃을 거두어들인다
文明의 하늘은 무엇인가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나는 지금 規制로 詩를 쓰고 있다 他意의 規制
아슬아슬한 설사다
言語가 죽음의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숙제는 오래된다 이 숙제를 노상 방해하는 것이
性의 倫理와 倫理의 倫理다 중요한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履行이다 우리의 行動
이것을 우리의 詩로 옮겨놓으려는 생각은
단념하라 괴로운 설사
괴로운 설사가 끝나거든 입을 다물어라 누가
보았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일절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우리의 증명이다 <1966. 8. 23>
 
이런 김수영의 몸에 관한 문제의식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61년부터이다. 먼 곳에서부터 몸이 아프다는 김수영의 문제의식은 사회가 가지고 있던 이승만 시절의 아픔이 시작의 계기라고 한다면, 생각과 이성과 다른 또 다른 층위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문제의식을 계승한다. ‘공자의 생활난’이라는, 한국식 코지토 명제, 동무여, 이제 바로보마, 사물과 사물의 진실을... 이라는 이성주의 접근이 나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반란에 대한 고민으로 이해하려는 편이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1961>
 
‘영성’이라는 개념의 표현은 전통적으로는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구도의 어느 한 편의 층위를 구성하게 된다. 질문... 정신에도 속하지 않고 육체에도 속하지 않는 별도의 영성이라는 개념 단위가 형성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그렇다면 영성은 또 다른 어디에서 포획, capture되는 양상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별도의 제 3영역을 형성하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여전히 환원론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고,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서양에서의 영성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와의 관계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Trinity, 3부일체론에서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때에도 히브리즘과 헬리이즘 사이의 충돌 속에서...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성경에 접목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정동 히랍으로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보아도 좋고, 니체의 생폴, 즉 성 바울에 대해서 자상히 비판하기 위하여 400페이지를 할애한 여명을 보아도 좋다).
 
우리나라에서의 영성은 웹상의 규모 면으로 볼 때 2/3이 기독교의 영성 회복운동과 관계있어 보인다.
 
규모상으로 1/3에 해당하는 또 다른 영성에 대한 담론은 정신과 몸이라는 고전철학적 2분법에 잘 포획되지 않는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체계화된 철학으로 얘기할 수 분류할 수 있는 인도의 신 체계에서 여신인 시바가 반드시 파괴를 상징하는 것만은 아니고, 탄생과 조화의 또 다른 측면을 상징하고, 反신의 테제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사실은 아시아의 전통적인 샤먼의 전통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샤먼의 세계관에서 정신과 몸이 유럽의 전통처럼 그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며, 접신은 오히려 일상적인 일이기도 하다. 조금 더 심리사회학적 접근에서는 이러한 접신을 물신적으로 배척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탄생 배경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성은 때때로 反자본주의적 담론이나 양상(modality)의 형태를 띄게 되는데, trust나 생협 그리고 샤먼적 영성이 자본주의에 대해서 작동하는 메카니즘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보완적이면서도 반대적이고, 시스템 내부에 속하지는 않지만, 시스템이 커져가면서 없어지지 않고 같이 성장하는 요소들을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로 얘기하면 미토콘드리아 보다는 비본질적이지만, 암세포보다는 비적대적인 관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형작업장에서의 야근을 관리하기 위한 ‘조직적 믿음’이나 ‘조직문화’라는 것이 분석이 대상으로 이론 안으로 들어온 것은 대단히 늦어 80년대 후반의 일이고, trust theory가 이론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몸은 시대에 대해서 은밀한 혁명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거부를 의미한다. 샤먼이 은밀한 혁명을 의미할 것인가? 남미의 갈레아노 손위로 올라간 동네 신들과 심지어는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미카엘마저 남미사회의 은밀한 거부와 혁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영성은?
 
2. 영성의 사회적 장치, 쇼비니즘 코리아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와는 층위를 달리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치가 가장 먼저 우리 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해서 포착된 것은 쇼비니즘(chauvinism)이라는 단순 환원장치를 통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DJ 말년, 2002년 국정홍보처가 공식적인 우리나라 구호로 채택한 다이나믹 코리아는 새마을 운동과 비슷하게 쇼비니즘을 건드리기 위한 장치이지만, 이 장치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 듣기만 해도 박정희 분위기 빡빡 풍기는 이 단어가 당시 총리이던 이한동과 대통령인 DJ의 손을 거쳐 결국 공식구호로 작동했지만, 이 다이나믹 코리아가 만들어낸 것은 카드 대란의 준비이고, 이를 통해 억지로 부양시킨 경기가 2년 동안 그야말로 여러 사람 힘들게 만들고 있다.
 
이 다이나믹 코리아에 대해서 불을 지른 사건이 공교롭게도 ‘오, 필승 코리아’ 사건이라고 이해하는 편이다. ‘붉은 악마’ 사건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보다는 오 필승 코리아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는 원래 수원 삼성의 구호였고, '오 필승 코리아'는 부천 SK의 구호였다. 우리나라 고대사의 잊혀진 한 부분에 해당하고, 이제는 전쟁의 신으로 독특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 ‘치우천황’을 상징으로 하는 붉은 악마 현상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은, 원래의 붉은 악마가 생겨난 이유가 우리나라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업의 손에 들어가 있는 프로축구팀들을 지역구단으로, 그리고 이로부터 아마추어팀의 클럽 시스템과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한 지역에서의 소위 안하무인격이던 축구팀과의 갈등에서 서로 연대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현상을 '붉은악마' 현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오 필승 코리아' 사건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영성에 대한 거대한 소비장치인 2002년의 월드컵 응원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라고 평가하기는 쉽지 않고, 일괄적으로 좋거나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의미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를 경계로 다시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구호를 정부에서 힘차게 들고 나왔고, 어쨌든 정책은 다이나믹 코리아를 위해서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냐는 묘한 사회적 맥락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축구 자체의 눈으로 보면 실제 초중학교 축구 선수들과 축구 매니아들은 이 때쯤을 경계로 오히려 축구 쇼비니즘과 상당 부분 결별하고, 축구 자체를 즐기는 또 다른 세계로 가고 있다고 대체적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사회는 아직도 이 쇼비니즘 코리아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영성과 사회의 영성이 움직이는 메카니즘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의 샤먼의 부활은 획일화된 민족주의의 다양한 각도로 분명히 갈라져서 2004년 가을이라는 한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오 필승 코리아의 무대가 끝난 뒤 그 무대가 촛불시위와 관계하는 것인가 아니면 구국기도회랑 연결될 것인가? 사람도 다르고 개체도 다르고, 참가원도 다르지만, 쇼비니즘이라는 단어로 시청앞 광장은 치우천왕 가면에서 갑자기 전혀 궤를 달리하는 하나님을 앞세운 구국기도회가 묘하게 연결되고 있다.
 
그야말로 영의 세계는 몸의 세계와 이성의 세계와 전혀 달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우파 쇼비니즘과 좌파 쇼비니즘
 
우리나라의 쇼비니즘은 특별히 집단적 영성과 더욱 관계를 가지는 양상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우파 쇼비니즘의 큰 줄기를 형성하는 것은 연유야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일부 기독교 같아 보인다. 좌파 쇼비니즘은...???

국가, 민족, 번영, 영성... 여기에 동북아 중심국가까지...
 
좌파와 우파와 은밀히 내통하는 통로의 가운데 토막이 지금으로서는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으로 우파 쇼비니즘과 좌파 쇼비니즘은 민족의 번영이라는, 그리고 국가의 융성이라는 말로 소통한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면 변질된 ‘균형발전’ 개념은 지역 쇼비니즘으로 이 좌파와 우파 쇼비니즘의 소통없이도 뜻을 교류하는 동북아 중심이 세포처럼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루트같아 보인다.
 
지역에서 구국기도회가 아니더라도 국가의 번영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동북아 중심국가당의 지구당처럼 균형발전교를 만들어내고, 여기에 좌파 쇼비니즘과 우파 쇼비니즘 그리고 지역 쇼비니즘까지 그야말로 자기들끼리의 소통과 믿음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야말로 쇼비니즘 코리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논설위원
 
* 필자는 경제학박사로 초록정치연대(www.greens.or.kr)  정책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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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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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04/11/02 [08:25]
필자에게도, 독자분에게도 잇을 수 없는 실수가^^
지적해 주신 흠...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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