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7일은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신지 110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맞이해 한글학회(회장 김주원)는 한글문화단체대표들과 함께 이틀 전인 7월 25일에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주시경 선생 무덤을 참배하고, 7월 27일에는 세종국어문화원 김슬옹 원장 안내로 미리 신청을 받은 시민들과 함께 주시경 마당에 있는 주시경 선생 기념 조각상 앞에서 추모식을 하고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살던 집터, 주시경 선생이 다닌 배재학당과 독립신문을 만든 곳을 거처 조선어강습원을 열고 제자들을 키운 상동교회, 그리고 국어연구학회(오늘날 한글학회)를 창립한 서대문 봉원사를 둘러보았다. 35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주시경 선생의 뜨거운 한글사랑 실천을 되새기며 매우 뜻깊은 날을 보냈다.
그리고 7월 27일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신 날에는 주시경마당에 있는 주시경 기념 조형물 앞에서 추모식을 한 뒤에 나는 참가자들에게 “우리는 한글은 태어나고 400년이 넘도록 제대로 쓰지 않았다. 그러던 1886년 고종 때 육영공원이라는 서양식 학교 선생으로 온 미국인 헐버트는 이 땅에 영어 로마자보다도 더 훌륭한 글자인 한글이 있는데 쓰지 않는 것을 보고 그 한글로 ‘사민필지’라는 세계역사지리 교과서를 만들어 한글이 얼마나 훌륭한 글자이며 한글을 쓸 때 나라가 더 빨리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주시경 선생이 배재학당을 다닐 때에 함께 독립신문도 만들었고 주시경 선생은 그 독립신문사 안에 한글을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두 분은 개화기 한글을 쓰게 한 고마운 분들인데 기념물이 없어 나는 서울시에 건의해 세우게 했다.”라고 그 조형물을 세우게 된 배경과 의미를 설명했다.
1886년에 육영공원 교사로 온 헐버트는 이완용과 관리들, 그리고 고종에게도 영어를 가르치고 1890년에 한글로 사민필지라는 교과서를 만들어 한글을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1895년 고종은 공문서를 한글로 쓴다는 칙령을 발표하고 1896년 서재필 헐버트 주시경들은 한글로 독립신문을 만들었고, 주시경 선생은 그 신문사 안에 한글을 연구하는 국문동식회를 조직하고 한글을 갈고 닦은 뒤 그가 한글을 가르친 제자들과 1908년에 국어연구학회(회장 김정진)를 만들고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 뜻과 꿈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주시경 선생이 제자들을 키운 조선어강습원이 있던 상동교회를 거쳐서 봉원사 언덕길을 올라갈 때에는 날씨가 너무 무더워서 이마에 땅이 나고 숨이 찼으나 한글을 살리려고 애쓴 주시경 선생을 생각하니 무더위를 이겨냈다.
주시경 선생이 1908년에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는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니 국어가 일본말이 되어서 우리말을 국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시경님은 그 학회 이름을 우리말로 ‘배달말글몯음’이라고 했다가 ‘한글모’로 바꾸었다. 그때 우리 글자도 국문(나라글자)이라고 할 수 없어서 우리말로 ‘한글’이라고 하고, 우리말을 국어(나라말)라고 할 수 없어서 ‘한말’이라고 우리말로 짖고 제 이름도 ‘한힌샘’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주시경 선생은 우리 말글을 갈고 닦았지만 우리말로 이름을 짓기 선구자였다. 그리고 한글책 보따리를 보자기에 싸들고 보성학교, 배재학당, 이화학당들을 돌며 한글을 가르치다가 ‘주보따리’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는 그렇게 무더운 여름에도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1914년 지친 몸에 먹은 것이 갑자기 체해서 돌아가셨다.
그때 제자 김두봉은 먼저 중국 상해로 망명을 했고 주시경 선생도 망명을 하려고 하다가 돌아가셔서 ‘한글모’ 활동이 좀 어려웠으나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921년에 ‘조선어학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여서 한글맞춤법을 만들고 우리말 말광을 만들다가 1942년에 일본 경찰에 학회 일꾼과 지원자 33명이 끌려가 이윤재, 한징 두 분은 모진 고문에 옥에서 돌아가시고 학회는 활동을 못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어학회에서 표준말을 정하는 일을 함께 한 한옥 건설업자 정세권 선생이 사전을 만드는 조선어학회(회장 이극로)에 사무실로 쓰도록 한옥을 한 채 주었는데 그 일로 정세권 선생도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한옥을 짓던 회사도 망하게 되었다. 그런 사실에 답사단원들은 일제의 못된 짓에 가슴아파했다. 그리고 그곳 길가에 조그만 표지석하나만 세워놓고 제대로 기리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 어느 해 여름보다도 무더운 올 여름, 주시경 선생 돌아가신 110년이 되는 날에 주시경 선생 발자취를 돌아보는 마지막 장소인 한글회관으로 왔다. 그런데 아직도 한글을 못살게 구는 무리들이 있어 주시경 선생이 만든 한글학회는 오늘도 정부와 국민들에게 한글이 태어난 곳인 경복궁 정문에 한글 현판을 달고 한글을 더욱 빛내어 튼튼한 나라를 일으키자고 외치는 펼침막이 걸린 한글회관 앞에서 답사단원들은 가슴아파했다. 아직도 한자를 섬기는 이들이 판치는데다가 영어가 우리 한말글을 못살게 짓밟고 있어 한글이 힘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글회관 5층에 있는 우리말 사전 원고와 조선어학회 사건 선열들 서른 세분 얼굴사진을 살펴보고 있는 답사단원들에게 “주시경 선생이 만든 한글학회는 일제 때에도, 대한민국에서도 정부로부터 한 푼도 지원을 받지 않고 이렇게 일생동안 한글을 지키고 살리고 빛내려고 애쓰고 있다.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 한글학회 회원들에게 고마운 손뼉을 칩시다. 그리고 함께 한글을 살리고 빛냅시다.”라고 부탁을 했다. 나도 일생동한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과 돌아가실 때까지 한글을 살리고 빛내려다 돌아가신 주시경 선생의 뜻과 꿈을 이루려고 한글학회로부터 활동비를 한 푼도 받지 않고 자원봉사하고 있기에 위안을 받고 싶어서였다.
주시경 선생은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살리려고 불꽃처럼 뜨겁게 살다가 1914년 7월 29일 39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겨레의 스승이다. 그런데 아직도 주시경 선생의 뜻과 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돌아가시기 몇 해 전인 1910년 6월 보성중학친목회보 1호에 쓴 ‘한나라말’이란 글을 다시 읽으며 한글을 더욱 빛낼 것을 다짐한다. 이 글은 훈민정음 머리글에 있는 세종대왕 말씀처럼 아주 고귀한 말씀이니 많은 분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한나라말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 나니라
한힌샘 주시경 씀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 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잘 닦아 지나니라.
그 말과 그 글은 그 나라에 요긴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나 다스리지 아니하고 묵히면 덧거칠어지어 나라도 점점 내리어 가나니라. 말이 거칠면 그 말을 적는 글도 거칠어지고 글이 거칠면 그 글로 쓰는 말도 거칠어 지나니라.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면 나라 사람을 열어야 되고 나라 사람을 열고자 하면 먼저 그 말과 글을 다스린 뒤에야 되나니라. 또 그 나라 말과 그 나라 글은 그 나라 곧 그 사람들이 무리진 덩이가 천연으로 이 땅덩이 위에 홀로 서는 나라가 됨의 특별한 빛이라. 이 빛을 밝히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밝아지고 이 빛을 어둡게 하면 그 나라의 홀로 서는 일도 어두워 가나니라.
우리나라에 뜻 있는 이들이여! 우리나라 말과 글을 다스리어 주시기를 바라고 어리석은 말을 이 아래 적어 큰 바다에 한 방울이나 보탬이 될까 하나이다. 말도 풀어 보려면 먼저 소리를 알아야 하는지라. 이러하므로 이 아래에 소리의 어떠함을 먼저 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