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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의 참된 겨레사랑 정신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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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대로
기사입력 2024-02-17

 2원 15일 11시 백기완 선생 3주기 추모식이 마석 모란공원 백기완 선생 무덤 앞에서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재)백기완노나메기재단 “불쌈꾼 백기완 3주기 추모위원회” 주최로 백기완 선생과 함께 한 민주민중운동가들 100여 명과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있었다. 이날 신학철 백기완노내메기재단 이사장은 “백기완 선생 정신을 받들어 노나메기 벗나래(세상)을 이 땅에 이룹시다.”라고 추도사를 했고, 명진 스님은 “백기완 선생의 뜻과 꿈을 이루기 위해 함께 나가자.”고 외치고 참석자들이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불렀다. 

 

https://www.facebook.com/reel/417136367400349 마석 모란공원 백기완 선생 무덤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는 백기완 선생 3주기 추모식 참석자들 모습 움직그림.

 

▲ 비를 맞으며 추모식을 준비하는 노나메기재단 회원들(왼쪽)과 종로구청에 백기완선생3주기추모문화제를 불허하는 종로구청에 항의하는 노나메기재단회원들(오마이뉴스 이정민 기자 사진)  © 리대로


그리고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은 17일 오후 4시에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서 백기완선생추모문화제를 열기로 했는데 종로구청에서 장소사용 허가를 해주지 않아 협상 중이라고 밝혔고, 노나메기재단 채원희 사무처장은 “통일문제연구소를 백기완 기념관으로 새로 꾸미고 그 이름을 ‘백기완마당집’으로 정했으며 5월 1일 노동자 날에 개관한다고 알렸다. 나는 백기완 선생 3주기 추모식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백기완 선생은 어떤 사람인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가 통일과 민중을 위해 독재정치와 맞서 거리투쟁에 온 몸을 바쳤지만 그가 우리말을 남달리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한 것이 우리 모두 본 받아야 할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백기완 선생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장으로 권력을 잡으려고 독재 권력과 싸운 이들이 권력을 잡은 뒤 우리 겨레 말글을 업신여기고 남의 나라 말글을 더 섬긴 것과는 차원이 더 높은 애국자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독재 권력과 온 몸을 바쳐서 싸운 것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나라와 겨레를 사랑했고 그 사랑을 실천이었다. 입으로만 애국한 것이 아니라 실천한 q이다. 잘사는 집에서 태어나 일류대학을 나오고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지낸 이들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면서도 민주, 민중운동을 한 백기완 선생이 더 애국자요 참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우리러보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가 이루지 못한 그의 뜻과 꿈을 본 받고 실천할 때 우리겨레와 나라가 더 빨리 일어난다고 생각하면서 아래와 같이 추모 글을 써 바친다. 

 

▲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우리 글자 한글은 우습게 여기고 수천 년 우리를 짓밟은 중국 한문을 더 섬기는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지낸 이들은 백기완 선생보다 못한 정치인이고 지도자다.  © 리대로


백기완 선생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참된 한겨레였다. 그래서 겨레말을 사랑하고 지키고 살리려고 애썼다. 얼 찬 겨레가 되어 튼튼한 나라를 만들고,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를 하나가 되게 하려고 몸과 마음을 바쳤다. 또한 그는 참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든 이가 다 같이 잘 살기를 바라고 힘없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이들과 맞서 함께 싸웠다. 한마디로 잘못된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불쌈꾼(혁명가)이었고 우리답게 살고 우리다운 나라를 만들려고 애쓴 참사람이었다. 그가 거리 투사가 되어 독재와 맞서 민주 민중 투쟁에 앞장을 선 것은 그가 참된 한겨레요, 참사람이었기에 그 겨레사랑, 민중사랑을 실천했다. 

 

그런 백기완 선생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94년 조선일보가 일본 한자말을 한자로 쓰자면서 그 신문 1쪽에 “亞太시대 우리들의 국제문자 漢字를 배웁시다.”는 글을 17회 째 연재할 때였다.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를 외치며 한자조기교육과 함께 영어조기교육까지 하겠다고 나서고 언론 권력자인 조선일보가 함께 그러니 우리 말글은 바람 앞 촛불과 같았다. 그것은 일제로부터 풀려난 광복 뒤부터 우리 말글을 쓰기 시작해 어렵게 살아나는 겨레말과 얼을 못살게 구는 일이었기에 한글단체는 그걸 어떻게 막을지 애태울 때였다.

 

그때 나는 한글단체 그 대책회의에서 백기완 선생을 모시고 조선일보 잘못을 따지고 혼내주는 강연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백기완 선생이 대학생들에게 강연을 할 때에 ‘써클’이란 미국말 대신 ‘동아리’란 우리말로, ‘신입생’이란 한자말 대신 ‘새내기’란 우리말로 바꾸어 쓰자고 하고 그 분 삶이 우리겨레 얼을 살려서 줏대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으로 봤기에 자신 있게 내가 모시겠다고 말하고 백기완 선생을 찾아가 조선일보가 하는 못된 짓을 혼내 주십사 말씀을 드렸더니 한글학회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것이 뜻밖이라면서도 좋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박정희 정부에 ‘터널’이란 양키 말을 쓰지 말고 ‘맞뚜레’라고 우리말을 쓰라고 말했다가 경찰에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기도 했다. 나는 쌍 도끼다. 그런 못된 놈들은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된다. 도끼로 찍어내야 한다. 전에 이 선생이 한겨레신문과 동아일보 들에 쓴 글과 국어운동 기사를 보고 만나고 싶었다. 잘 왔다. 나와 얼 찬 나라 만들기를 함께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신문을 보면서 조선일보와 김영삼 정부가 하는 못된 짓을 알고 있었고 혼자 애타고 있었는데 뜻이 통하는 젊은이가 찾아오니 반가워하셨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백 선생과 함께 우리말과 얼을 짓밟는 자들에 맞서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만나 바로 동숭동 학술재단 강당에서 백기완 선생과 김동길 교수를 모시고 우리 말글을 짓밟는 조선일보를 혼내는 강연회를 열어 그 못된 짓을 막은 일이 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우리말 살리는 일을 자주 의논했는데, 어느 날 백 선생이 “우리말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주는 ‘문학상’을 만들자. 이 선생이 나서면 될 것이다. 나도 돕겠다.”고 하셨다. 겨레말을 살리고 빛내어 튼튼한 나라를 만들자는 뜻이었다. 그 뒤 백기완 선생이 우리말로 노랫말도 짓고 토박이말을 살려서 글을 쓰는 모습이 거룩했다. 

 

백 선생은 입으로만 겨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분이었다. 제 이익을 얻자고 민족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본받기 바라면서 나는 2002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에서 “우리말 으뜸 지킴이”로 뽑았는데 백 선생은 한 방송에서 “난생 처음 자랑스러운 상을 받았다.”라고 기뻐하셨다. 상장도 주지 않고 상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겨레이름으로 마음만 주는 것이기에 다른 이들은 그렇게 기뻐하지 않는데 이 분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거룩한 참사람이었다. 제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물질과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뜻과 마음을 더 크게 본 것이다. 그 정신과 태도가 남다른 것이고 모두 본받을 일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모자란 것은 자주정신이고 절실한 것은 자주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려면 백기완 선생 뜻과 삶을 본받아야 한다. 2007년에 내가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한국어를 가르치려고 갔는데 그곳 소흥은 중국 사상가 노신과 정치인 주은래 고향이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중국 수상을 지낸 ‘주은래’보다 민족운동가 ‘노신’을 더 우러러보고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보다 민족운동가요 민족문화인이 사람을 더 받드는 중국인들을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신은 중국이 한자를 버리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고 한 민족 운동가였다. 그런 중국은 지금 빨리 일어나 미국과 맞서는 강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중국 노신이 백기완 선생은 모습과 삶이 닮았다고 느꼈다. 중국 주석 강택민이 노신 고향에 노신 동상을 세우고 ‘민족혼’이라고 쓴 것을 보면서 제 민족을 남달리 사랑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제 민족이 일어나는지 노신과 백기완 선생은 알고 있었고, 중국을 침략한 일본에 저항한 삶과 생김새도 두 사람이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도 대통령을 지낸 이들보다 백기완 선생 같은 문화인, 사상가, 민족 운동가를 더 우러러 볼 때에 나라가 빨리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제2, 제3 백기완이 되어 겨레말글을 살리고 빛내어 튼튼한 나라를 만들자. 이 일은 백기완 선생을 위한 뜻과 꿈만이 아니고 온 겨레와 인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 중국 전 주석 강택민이 노신을 “중국 민족혼”이라 쓴 동상 옆에서 찍은 사진(왼쪽)과 백기완 선생이 쓴 “사랑도 미움도 남김없이” 글묶 출판기념회 때 한겨레신문사에서 찍은 사진(오른쪽). 중국 노신과 한국 백기완 선생은 생긴 모습과 삶과 넋이 매우 닮았다.  © 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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