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 활동가들의 잔혹극
지난 여름, 수원에 있는 한 재판정에서 놀라운 연극이 상연되었다. 판검사의 냉철함으로 소송 사건을 심리하는 곳이라 여겨지던 장소가 이날은 비인간 동물의 비명과 인간 동물의 흐느낌으로 가득 찬 뜨거운 연극 무대가 되었다. 연극의 주최자는 바로 동물권 직접행동 단체 디엑스이(Direct Action Everywhere-Korea)였다.
디엑스이 활동가들은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양계장 트럭을 온몸으로 가로막아 업무방해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약식기소로 1심 판결을 받은 이들은 곧장 항소했는데, 항소 목적은 다름 아닌 공개 변론 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2020년 7월 16일 항소심 당일, 활동가들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야 할 변론 시간에 인간을 대표해 죄를 고백하고, 거대한 자본 시장 안에서 사육되고 도륙되는 모든 비인간 동물을 대변해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했다. 이렇게 활동가들은 법관이 주도하던 인간의 법정을 동물들의 무대로 뒤바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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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 『벤저민 레이』에서 벤저민 레이의 게릴라 연극을 보며 2020년 여름에 있었던 동물권 활동가들의 연극을 떠올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예제를 향한 벤저민 레이의 투쟁에 저자 마커스 레디커가 붙인 ‘게릴라 연극’이라는 표현을 접하고, 동물권 활동가들의 증언투쟁을 한 편의 연극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 법정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19세기 벤저민의 게릴라 연극과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투쟁을 벌인 장소가 유사했다. 동물권 활동가들이 법정을 선택했다면 벤저민 레이는 퀘이커 월례회의장을 선택했는데, 이곳들은 모두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대표적인 공적 장소들이다. 다음으로 양쪽 다 붉은 피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모두 투쟁의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각각 인간-동물-노예와 비인간-동물-상품의 고통스러운 삶을 재현할 목적으로 연극을 기획했고, 따라서 연극은 자연스레 붉은 피로 물든 잔혹극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정리하면 벤저민과 동물권 활동가 양쪽 모두 가장 고통받는 존재들의 삶을 공개적으로 재현하는 충격적인 잔혹연극을 가장 공적인 장소에서 상연했다.
벤저민 레이의 게릴라 연극
21세기 동물권 활동가들은 “지금, 당장 모두의 해방”을 부르짖는 투사들이다. 그래서 연극이라는 말이 이들의 치열한 싸움에 붙이기에는 너무 가벼운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하지만 『벤저민 레이』는 이런 우려를 넘어 투쟁과 연극을 연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달리 말해 투쟁의 예술적 측면을 강조하고 삶에서 예술의 진정한 힘을 되살려내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19세기를 살았던 벤저민 레이는 고통에 무척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예의 고통스러운 삶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는데 당시 노예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자본의 핵심적인 상품 중 하나였다. 예나 지금이나 자본 시장은 죽음과도 같은 삶, 심지어 죽기 위한 생명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본의 전 지구적 지배하에 우리는 모두 이 끔찍한 사업들에 연루된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로부터 큰 이득을 얻는 적극적 행위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아무런 실익도 없이 정작 본인에게도 해로운 이 죽음의 사업에 저도 모르게 가만히 연루된다.
물론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그러한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그 심각성과 끔찍함을 잘 체감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방관하고 방치하는 것으로 그 사업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에 벤저민은 연극을 기획했다. 그야말로 스펙터클하고 드라마틱한, 그래서 한 번 보면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연극을 기획하고 상연했다. 벤저민 레이의 충격적인 잔혹연극을 본 사람들은 이제 노예제에 관해 생각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의견을 만들고 현실적인 결정들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노예제 폐지의 첫 포문을 연 벤저민 레이의 중요한 투쟁법이 연극이었다는 사실은 연극 속에 담긴 메시지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준다. 좋은 연극이란 어떤 것일까? 연극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투쟁으로서의 연극, 마술로서의 예술
벤저민 레이와 동물권 활동가의 닮은 점이 또 하나 있다. 투쟁의 대상인 노예제와 공장식축산에서 이들은 직접적인 피해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통에 예민한 투쟁가들은 본인이 아무리 힘들고 낮은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피해자로만 정체화하지는 않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촘촘한 다단계 착취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내가 행한 착취의 기억을 내가 당한 착취의 기억보다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지금, 당장 모두의 해방”을 외치며 구속당하고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함과 동시에 누군가를 구속하고 살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다. 그래서 이들은 더 고통받는 존재에 주파수를 맞춰 그들의 끔찍한 삶을 재현하고 고통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진실을 폭로한다.
20세기 예술가 앙토넹 아르토는 <잔혹 연극>이라는 선언문에서 “연극은 오로지 마술과 제의의 반영”이기 때문에 “진정한 연극의 말”은 “주술의 언어”여야 한다고 했다. 벤저민 레이와 동물권 활동가들의 연극을 떠올려 보면 이 말의 의미가 금방 다가온다. 관객을 충격에 빠트리는 이들의 잔혹극이 바로 죽어간 수많은 노예와 동물들을 향한 제의였으니 말이다. 선언문에서 ‘제의’와 함께 등장하는 ‘마술’이라는 단어도 인상적인데, 이는 정치철학자 조정환의 책, 『예술인간의 탄생』에 등장하는 ‘마술인간’ 이야기와 잘 연결된다.
『예술인간의 탄생』 서문에서 저자는 “우주와 개체적 자기의 합치를 추구했던 오래된 마술인간”을 이야기하며 예술인간이란 이 마술인간을 “‘누구나’의 주체성으로 불러내어 새롭게 구축하는 실천적 술어”라 말한다. ‘우주’와 ‘나’의 합치를 추구하는 마술은 다름 아닌 세계를 바꾸는 기술이고 힘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역량이 특수한 몇몇 개인에게 귀속돼 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술인간은 이러한 문제를 경계하며 그 마술적 힘을 아래로부터 살려내기 위한 실천적 개념이다. 그리고 벤저민 레이와 동물권 활동가들이 선보인 잔혹 연극은 마술적 힘을 아래로부터 살려내는 예술인간의 훌륭한 사례들이다.
아래로부터의 지성사
『벤저민 레이』의 저자 마커스 레디커도 마술적 힘을 아래로부터 살려내는 벤저민 레이의 면모에 주목한다. 그는 책에서 여러 번 벤저민 레이를 지식인으로 호명하는데 여기에는 정규 교육과정과 전혀 상관없이도 평생 배우기를 욕망하고 책을 사랑하며 공부를 기쁨으로 여겼던 벤저민 레이를 통해 아래로부터의 지성사를 쓰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듬뿍 담겨있다. 책에서 이러한 저자의 의도가 단연 돋보이는 대목은 벤저민 레이를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연결하는 부분이다.
열정적인 독학자 벤저민은 고대 철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중에서도 견유학파를 창시한 디오게네스의 사상과 실천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때 노예였던 디오게네스는 노예적인 삶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 지배자(노예주)의 삶이 아닌 “자연과 합치하는 삶”을 추구한 철학자였다. 벤저민은 디오게네스를 공부하며 그의 정신을 자기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자연과 합치하는 삶”은 ‘견유’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동물과 사이좋게 어울리는 것이고 동시에 모든 만물, 즉 우주와 어우러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의 유명한 일화는 지배자의 삶과 자유로운 삶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잘 보여준다. 지배(알렉산더)란 자연(햇빛)과 존재(디오게네스)의 사이를 가로막고 연결을 끊어 버리는 폭력이다. 따라서 “자연과 합치하는 삶”을 위해서는 이러한 폭력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거기 서서 해를 가리지 마시오.” 디오게네스의 이 말은 조화로운 삶을 위해 아래로부터 권력에 맞서는 지식인의 정신을 보여준다. 벤저민 레이는 자본의 노예들이 고통받고 죽어가던 18세기에 이러한 견유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탁월하게 실천한 지식인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예술사
인간의 지성사를 아래로부터 써나가는 데에 좋은 씨앗을 제공해 주는 견유주의 정신은 근대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친 바가 있다. 『예술인간의 탄생』은 근대 혁명적 예술 운동 속에서 견유주의 정신이 재출현했음을 지적하며 이후 예술의 역사에서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슬프게도 근대 이후 이 혁명적 정신은 자본에 전유되고 위로부터 불어오는 신자유주의의 거센 바람을 맞으면서 무참히 왜곡돼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예술적 삶은 “동물적이기보다 괴물적”인 것이 되고 “자연과 부합되지 않는, 끊임없이 부패하면서 확고부동한 평온을 상실하는 삶”이 돼 버렸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술인간의 탄생』은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근대의 예술 개념이 전문성을 중심으로 구축됐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실질적으로는 다중의 예술적 능력을 압류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자본권력에 의해 위로부터 작동하는 예술은 우주와 개체적 자기의 합치를 추구하는 기술이기를 멈추고 가장 연약한 생명부터 죽이는 살생 기술이 되고 만다. 오늘날 위로부터의 예술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예술사가 시급히 필요한 이유다.
“자연에 일치하는 삶”이라는 원칙에 따라 예술적 삶을 추구했던 예술인간 벤저민 레이는 고급 예술교육과 아무런 상관없이도 예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동물들과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놀라운 연극을 기획한 동물권 활동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예술가라 부르고 그들의 연극을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예술사, 다중의 예술사를 쓸 수 있다. 빼앗긴 다중의 예술적 능력을 되찾고, 예술의 가능성을 되살릴 수 있다.
*글쓴이는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