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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 포교사의 역사로 뽑힌 혜명당(慧命堂) 무진장(無盡藏) 대종사의 포교 전승 역사를 연구한 책이 눈길을 끈다.
무진장(1932~2013) 대종사가 불교에 입문해 불교를 학습하고 포교를 하는데 전념하고 열반한 스님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진관 스님과 원종 스님이 펴낸 <무진장 포교 전승 역사역구>(중앙승가대학교 출판부, 2020년 6월)는 근대 불교계에 있어 무진장 대종사의 포교불교사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무진장 대종사는 한국불교계에 대한 애정과 진실성이 있었고 불교를 전하는데 있어 부처님 제자 가운데 가장 설법에 능했던 부루나 존자로 칭송받은 스님이었다. 그는 태국과 일본 유학을 통해 불교 신학문을 배웠고 대중들에게 불교의 존재를 전한 최고의 포교학승이었다.
그는 60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서울 종로 파고다 공원을 찾아 대중을 상대로 설법을 했다.
“한국불교계가 일어나 불교를 포교한다면 불교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매일 끼니를 거르는 일도 많았다. 파고다공원에서 당시 농촌에서 상경해 오갈 때 없는 젊은이들이나 가난한 도시의 대학생들과 어울려 설법을 했다. 특히 공원에서 노숙을 하던 부랑인들을 거두어 숙식을 함께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연설하면서 불교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파고다공원에서의 연설은 마치 부처님 당시에 부루나 존자의 모습과 같은 웅변가로 등장하게 됐다.” -본문 중에서
스님은 제주에서 출생했지만 육지로 와 범어사로 출가해 대중포교의 방법과 조계종 종단의 위상을 높이는 포교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철학을 가미한 정확한 어휘의 설법으로 청중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설법은 주로 금강경, 법화경, 유마경, 육조단경, 선문염송 등을 통해 중생들에게 설법을 전했다. 설법을 청취한 수많은 청자들은 언제나 당당한 목소리로 청중을 감동시켰다. 설법을 할 때는 마치 웅변을 하듯이 했고, 정확한 어휘를 구사 했다. 언어는 시인 같이 시어를 주로 사용하듯이 정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그가 그동안 선승 중심의 원로회의 의원에서 최초 포교사 원로회의 의원으로 추대된 점의 의미도 상당하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원로회의 의원은 그동안 선승 중심이었다. 선승 중심에서 그동안 금기시 됐던 원로회의 의원이 포교사가 된 점은 대한불교조계종의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무진장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을 장악하기 위한 환란의 시대에도 조계사 대웅전에서 설법을 쉬지 않고 한 대근기의 포교사였다.” -분문 중에서
그럼 무진장 대종사가 살아생전 밝힌 설법을 하나 인용해 본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범부라 할 것이요. 한 생각을 깨들으면 부처라 할 것이며, 한 생각이 경계에 부딪히면 곧 번뇌요. 보리가 곧 번뇌요. 번뇌가 곧 보리니라.” -본문 중에서
저자들은 일본 식민지시대 태어난 무진장 대종사가 불교에 귀의해 대중들을 위해 부처님 경전을 전하는 불교포교에 전념했고, 일본식민지시대에서 해방된 이후 분단 한국이라는 시대에 한국불교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불모지였던 불교포교의 시대에 대중들에 경전을 통해 불교를 전하는 교학포교에 대한 기틀을 마련했다고도 평가했다.
특히 이 책은 53년 불교정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불교정화이념 목표 가운데 포교사로서 불교를 대중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포교의 사명에 대한 역사를 시대별로 조명했다는 점이다.
53년 동산 스님이 첫 점화한 불교정화운동의 시작은 비구와 대처 간의 갈등에다, 이승만 정권이 이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점을 들을 수 있다.
“불교정화운동은 이승만 정권이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정치적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에서 출발한다.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집단의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53년 불교정화운동시기 승단은 보수적 승려세력과 혁신세력, 혹은 친일세력과 항일세력으로 갈려져 매우 복잡하게 분열됐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비구와 대처간의 분열이었다. 대처는 곧 일본 불교화를 상징했고, 이는 기득권을 가진 보수 세력의 의미했다. 구체적으로 불교정화운동의 점화는 기존 보수교단과 선학원측의 선승간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본문 중에서
바로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을 포교로 전한 인물이 무진장 대종사였다.
그럼 한국불교 포교·법문의 큰 스님인 무진장 대종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진장은 호이다. 혜명당은 법명이다. 본명은 김현홍이다. 1932년 9월 2일 북제주군 조천면 와흥리 223번지에서 한의사인 부친 김택익과 모친 이진문 사이에서 태어났다. 13세 때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16세 때인 48년, 대한민국 건국과 제주 4.3사태가 일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6.25)이 반발해 학도의용군(18세)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21살에 군대를 제대했고, 이미 부친이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이에 상심하다 출가를 결심했다. 56년(24세) 모친과 이별하고 출가하기 위해 속리산 법주사로 갔고, 다시 그해 3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불교정화운동의 상징인 동산 대종사 큰스님을 은사로 수계를 받은 후, 이곳 강원에서 학문을 계속했다, 60년 동국대 불교학과 입학을 해, 4.19학생혁명을 접했다. 이때도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학생, 걸인, 지식인 등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했다.
64년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불교대학원에서 수학했다. 68년(35세) 태국으로 유학해 왓 벤차마보핏 사원에서 남방불교를 연구했다. 이어 70년(37세) 일본 경도에 있는 불교대학 대학원에서 천태학 연구 등을 했다. 71년 귀국해 조계사에 머물며 청빈한 삶을 실천했다. 77년 대한불교 조계종에 포교원이 창설되고, 이후 포교활동에 전념했다.
80년 제2대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장, 89년 4대 포교원장을 지내면서 평생 일반 재가자를 위한 포교활동에 진력했다. 이 때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2006년 동국역경원 후원회장으로 불교경전 번역 사업에 매진했고, 2007년 포교사로서 첫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총 25명)으로 추대됐다. 2008년 대종사 품계를 받았고, 2010년 조계사 회주로 추대됐다. 2013년 음력 8월 6일 일산 동국대병원에서 세수 82년, 법납 57년에 열반했다.
공동 저자인 진관 스님은 문학박사이며 철학박사이다. 현재 무진장불교문화원장,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고구려시대 불교수용사 연구>, <근대불교정화운동 연구>, <조선승군의 임진왜란 참여연구> 등 다수이다.
원종 스님은 명예 문학박사와 명예 행정학 박사이다.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제주불교문화대학 학장, 볼모산 성주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불교도감>, <화엄경 보현행원품>, <법망경>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