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경선의 결선투표가 시작되었을 때, 심상정 의원은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된 이명박을 상기시키며 경제에 식견이 있는 자신이 출전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국회에서 4년동안 재정경제상임위 활동을 해왔고 작지 않은 성과를 일구어냈다. 그는 소속 정당이 가진 실물경제 콤플렉스를 적절히 자극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1차투표를 통과한 기세를 몰아 심의원이 이명박에 맞서는 경제 대통령후보론을 펼칠 때, 맞상대인 권영길 후보는 이명박이 만든 프레임에 걸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당내 경선을 대충이라도 살펴보았다면 이것이 솔직하지 못한 고백임을 알 수 있다.
경선기간 중 노회찬 의원의 경우 세금 부문에 대한 자신의 공세 직후 이명박 후보측이 제 홈페이지 정책란에서 종부세철폐 공약을 철회했다며 자신감을 표하였는데, 권후보측은 이명박의 동갑내기면서도 정반대로 살아왔던 이력을 내세우며 그 역시 이명박의 대항마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9월에 접어들자 추석 차례상에 ‘좌권우박(왼쪽에 권영길, 오른쪽에 이명박)’을 올려달라고 호소했다.
만일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명박을 적수로 상정한 선거전략은 대거 수정되거나 취소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전술 운용은 미시적이고 부분적인 차원에서 그쳐야 한다.
근래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프레임전쟁>에서 설파했듯 문제는 ‘프레임’인데, 상대가 짠 프레임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프레임을 뒤바꿔놓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명박이 떴으니 내가 나가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절대 이명박을 잡을 수 없다. 이명박의 경제논리를 공박하기 위해 경제논리를 최우선에 두는 것으로도 이명박의 경제논리를 잡을 수 없다. 그것은 꿩 잡는 매의 논리가 아니라 닭 놓치고 지붕 쳐다보는 개의 논리이다.
이런 실수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이다. 그는 민주노동당이 욕심낼 만도 한 ‘사람중심 진짜경제’를 선점하였다. 그것은 권영길 후보를 떨구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명박의 덫에 시나브로 빠져드는 결과를 낳은 것도 사실이다. 경제에 진짜 경제와 가짜 경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둘로 나누자면 사회원리에 통제받는 경제와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이명박과 관련된 ‘경제’의 원리에 그렇게 거창한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명박에게 호응을 모아준 ‘경제’는 전직 CEO이자 서울시장에게 보내는 구체적인 믿음과 막연한 희망이 뒤섞인 것이다.
설득이 어려운 지경에 이른 다수 유권자를 이명박에게서 이탈시키는 것은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도리어 경제에는 경제라는 식으로 맞불을 지피는 것은 상대방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게임을 용인하고 그대로 진행하는 행위로 흐를 수도 있다. 또 이명박에게 묻어가는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 MBC <무한도전>의 질서에서 박명수는 절대 유재석을 이길 수 없다. 민주노동당과 문국현은 패배함으로써 웃음을 선사하는 코미디 프로의 보조MC가 아니지 않는가. 거짓말로 신뢰를 얻은 자를 공격하려면 자신이 먼저 독자적인 신뢰를 얻어야 한다.
문국현 후보는 현재 반부패담론을 전면에 걸고 있다. 선후가 뒤바뀐, 늦은 행동이다. 그는 처음에 쓸데없이 넘쳐흐르는 경제담론에 열중하기보다는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것들을 부각시키고 대중의 분노를 일깨웠어야 한다. 유능하고 청렴한 기업인이라고 자부한다면 더욱 그래야 했다. ‘나도 사장해봤는데 말이야’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력도 알고 있다. BBK사건으로 인해 이명박의 향방도 불안하기는 하나 명색이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제1야당의 대통령후보가 경제논쟁으로 허를 찔려 추락하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했다. 이명박이 경제에도 무식하다는 경제논쟁은 막판 대반전의 소재로 충분하다.
정동영 후보는 문후보나 권후보보다는 자신의 프레임을 짜는 데에 성과를 거둔 듯하다. 권후보의 경우 정후보가 공약에서 표방한 것 이상의 구체성과 일관성을 갖고 있음에도 언론의 냉대로 고전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후보가 예상보다 뚜렷하고 화끈한 행보를 걷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내게 2002년 당시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유종근조차 꺼려하는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주장하고 급기야 노무현에게 ‘극좌’ 운운했으며, 열린우리당 의장이 된 뒤에는 출자총액제한제의 완화에 나섰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본선에 나온다면 범여권의 입지가 크게 축소될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절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물밑의 조직력으로 판세를 장악한 정후보는 본선 정국에서 금산분리를 고수하고 이라크파병 연장을 반대하며 입시철폐까지 공언하고 나섰다. 삼성 문제에서도 적극적이다. 이명박에게도 평화에 중점을 두어 대항하고 있다. 나는 그를 결코 신뢰하지 않으며 노무현보다도 더 극심한 신자유주의자의 모습을 본다. 그렇지만 그가 결국 문국현을 끌어들여 ‘평화 대통령-경제 총리’의 진용을 짜면 승산이 없진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도 프레임전쟁의 초반전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이회창 후보다. 그의 사자후는 정동영의 움직임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자거나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의 천민자본주의는 안된다.” “이 나라는 돈 잘 벌고 재주가 좋아 출세하는 사람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이회창은 적장의 무기를 내려치지 않고 직접 심장을 겨누었다. 그의 발언이 그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가리라는 점과 안정적 지반을 가진 극우파의 후보로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웃기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권영길 후보나 문국현 후보는 곱씹어보아야 할 것이다.
“알고 보면 이명박보다 우리가 경제를 더 잘 한다”는 주장보다 국민들이 먼저 듣고 싶었던 것은 저런 발언이 아닐까? 이명박 광풍에 의해 차마 터져 나오지 못한 항변을 조직해야 이명박의 경제노선을 무너뜨리는 순간도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